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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통신사의 길을 가다(28)|<에도>강호방위"최후의 관문"<하꼬네 세끼쇼>상근관소 통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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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지금의 하꼬네(상근)는 동경에서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관광명소로 첫 손가락에 꼽히는 곳이다.
신쥬꾸(신숙)를 시발역으로 하는 로맨스 카는 서남쪽으로 바람을 가르며 달려 1시간35분만에 하꼬네의 입구 유모또(탕본) 온천에 관광객을 내려준다.
여기서 등산 철도와 케이블카를 차례로 갈아타고 조운잔(조운산)을 넘어 아시노꼬(호지호)에 이르는 관광코스는 깊은 계곡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유황 연기와 계절에 맞추어 옷을 갈아입는 낙엽수림이 엇갈려 장관을 이룬다.
호수의 북쪽 끝에서 케이블카를 내려 유람선으로 갈아타고 둘레 20여km의 아시노꼬를 남으로 종단하면 2백여년전 우리 통신사들의 발길이 닿았던 역사의 고장 모도하꼬네(원상근)에 이르게 된다.
해발 7백50m의 산정 호수 아시노 호수 호반에 자리잡은 모도하꼬네는 지금도 미시마(삼도), 아따미(열해), 오다와라(소전원), 고덴바(어전장)등 주변의 도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지만 에도(강호)시대에는 「천하의 험(험)」으로 알려진 「하꼬네 80리 길」의 중간 역참으로 이름을 떨쳤던 곳이다.

<아름다운 아시노호 관광명소로 손꼽혀>
도오까이도 (동해도)를 따라 에도로 가는 여행객은 하꼬네 남쪽의 미시마를 떠나 해발 1천m의 하꼬네 고개를 넘어 모도하꼬네에서 다리를 쉰 후 악명 높던 하꼬네세끼쇼 (상근관소·검문소)를 통과, 동쪽해안의 오다와라로 빠지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다.
통신사의 행렬도 이 길을 걸었다. 미시마에서 하룻밤을 묵은 신유한공 일행은 다음날 해가 뜨자 길을 떠나 하꼬네 고개를 올랐다.
지금도 그렇지만 미시마에서 모도하꼬네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기로 유명하다.
찹살을 지고 고개를 넘으면 땀과 열기로 찹쌀이 밥이 된다고 해서 찹쌀밥고개 (고와메시사까)라는 별명이 붙어 있을 정도다.
신공은 해유록에 하꼬네 고개를 넘을 때의 정경을 이렇게 묘사하고있다.
「길은 험하고도 가파라서 교꾼들이 힘을 다해 올라간다. 자주 교대하며 쉬지만 그래도 숨결은 가쁘기만 하다. 가마 안에서 보니 우삼동 (우삼방주)이 말에서 내려 걸어간다. 왜 걷느냐고 했더니 『이 고개는 매우 험하기 때문에 말을 타고 가다간 내가 다칠까 두렵고 가마를 타고 가자니 남을 다칠까 두려우니 내 스스로 수고하는 것보다 더 좋은 길이 없소』한다. 이렇게 가기를 40리나해서 꼭대기에 도달했다.」
지금은 국도 1호선이 옛 하꼬네 고개를 넘고 있어 자동차의 행렬이 연락부절이다.
그러나 자동차 길옆에는 이곳저곳 옛 도오까이도의 흔적을 알리는 푯말이 서있고 찻길을 가로지르는 구 도로에는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에 매끈매끈해진 「돌다따미」가 잡초 속에 그대로 남아 있어 옛날 이 돌을 밟고 지나갔을 통신사 일행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돌다따미란 돌로 포장된 돌길이다.
하꼬네 가도는 원래 진흙길이어서 비가 오거나 눈 녹는 계절에는 무릎까지 빠져 고생이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l635년 산낀고따이 (삼훈교대)제도가 생겨 간사이(관서)지방의 영주들이 6개월에 한번씩 이 길을 지나다니게 되자 1680년 대대적인 도로정비공사를 벌여 하꼬네 고개뿐 아니라 모도하꼬네에서 오다와라에 이르는 80리 길 요소 요소에 돌을 깔았다.

<돌 깔린 고갯길 80리 사적으로 지정 보호>
에도 막부는 집권하면서부터 지방 영주들을 다스리는 방편으로 도로정비에 힘써 에도를 중심으로 5개의 간선도로 (오가도)를 개설했지만 하꼬네에 이처럼 방대한 돌 포장도로를 만들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돌다따미는 하꼬네 고개 중턱의 사사하라신뗀 (세원신전)의 2백94m, 야마나까신뗀 (산중신전)의 3백34m를 비롯, 모도하꼬네 주변과 오다와라로 넘어가는 구 가도 등 도처에 그대로 남아 사적(사적)으로 지정되고 있다.
가파른 고개를 넘어 모도하꼬네의 사관에서 잠시 쉬는 동안 신공일행은 호수를 끼고 좌우로 전개되는 아름다운 경치에 심취한다.
다시 해유록을 보자.
「호수의 인가는 매우 은성하며 그 가운데 큼직한 건물이 호수를 눌러보고 있는 것이 사행의 사관이다. 소나무·삼나무·단풍나무·대나무들이 짙푸르게 우거지고 떨어지는 노을과 나는 새들은 가을물결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다투며 아득한 고깃배는 하늘 끝에서 오락가락 한다. 부사산은 높다랗게 구름 위에 솟아 있어 푸른 물에 거꾸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곳에서 잠시 피로를 푼 일행은 바로 오다와라로 발길을 재촉, 마을 밖에 설치된 하꼬네세끼쇼를 통과한다.
하꼬네세끼쇼는 아라이(신거)세끼쇼와 함께 도오까이도에서 가장 중요한 검문소로 검문·검색이 철저하기로 이름 높았던 곳이다.
에도 막부가 이곳을 특히 중시했던 것은 하꼬네로부터 에도에 이르는 관동평야에는 그 이상 검문·검색에 편리한 길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꼬네 검문소는 말하자면 에도로 들어가는 최후의 관문으로서 에도 방위의 가장 중요한 요새였다.
이 때문에 통행증이 없이는 아무도 통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봉건영주나 교오또(경도)의 귀족 등 신분이 높은 사람도 가마 문을 열고 모자를 벗고 지나가야 했다. 특히 에도에서 밖으로 나가는 여자와 외지에서 에도로 반입되는 총기류는 「이리뎁뽀 데온나」(입철포·출녀)라고 해서 엄격한 검색의 대상이 됐다. 여자의 경우는 머리속까지 샅샅이 뒤질 정도였다.

<삼나무 4백32그루 옛 사연을 안고 버텨>
그러나 에도 막부 최대의 성의로 맞이하는 통신사 일행은 아라이 검문소 때와 마찬가지로 이곳을 통과하는데도 아무 절차를 거치지 않는 특별예우를 받았다.
다만 1748년 통신사 때의 종사관 조명채가 남긴 『봉사일본시문견록』에는 세끼쇼의 관리들이 「상상관은 현교에서 내리고 차관은 말에서 내리는 것이 관례」라고 가마와 말에서 내릴 것을 요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일행중의 일부는 가마와 말에서 내렸으나 정사·부사·종사관은 물론 나머지 고급 수행원들은 모두 가마와 말을 탄 채 이곳을 통과한 것으로 돼 있다.
이때 조명채는 일본측에 하마하라는 근거를 대라고 항의하고 일본측의 요구를 그대로 일행에 전달하여 차질을 빚게 한 수석통역관을 몹시 꾸짖었다.
이같은 사연을 지닌 하꼬네세끼쇼는 지금도 모도하꼬네에 그대로 복원되어 관광의 명소가 되고 있다.
복원된 세끼쇼의 구조나 모양은 아라이세끼쇼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이곳을 지키던 무사의 인형을 만들어 놓은 것도 똑같았다.
옛날 행인들이 꿇어앉아 심문을 받던 자리에는 에도 시대의 복장을 한 두 남녀가 기념품을 파는 좌판을 벌여놓고 있다.
세끼쇼 유적지를 지나 옛길을 더듬으면 아름드리 삼나무가 길 양옆에 줄지어선 산보 길과 마주치게 된다.
지금 가장 생생하게 남아있는 구가도의 일부다.
에도 시대 일본의 주요 간선도로에는 소나무로 가로수를 심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하꼬네 가도는 지대가 높아 소나무가 적합치 않기 때문에 삼나무를 심었다.
모도하꼬네 구 가도에 남아있는 삼나무는 당시에 심은 가로수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들이다.
하꼬네 구 가도에는 지금도 4백32그루의 삼나무 가로수가 남아 돌다따미와 함께 옛 일을 전해주고 있다. <글 신성순 특파원 사진 김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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