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씨의 동경발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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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민중혁명이나 쿠데타 등 불행한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고 한 김영삼민주화추진협의회의장의 동경발언이 정가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발언에 대해 민정당은『국민들의 여망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무책임한 언동』이라고 비난한 반면 신민당은『진정한 애국심에서 여러 차례 천명한 것』이라고 옹호하고 나섰다.
재야지도자로서 김씨가 대통령직선제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천하공지의 사실이다. 2·12총선에서 신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한 것도 직선제개헌공약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신민당은 믿고 있다.
개헌문제가 지금 우리 정치의 최대토론으로 등장한 것은 그 때문이다.
12대 들어 국회가 제 기능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잦고 여야관계가 대결양상을 띠는 것은 개헌을 둘러싼 대토론 앞두고 기선을 잡으려는 당낙과 무관치 않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소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엄밀한 한계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대국과 양식에 입각해야할 뿐더러 어떤 계제에 어디서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평소 갖고 있던 개헌에 대한 소신표명이라고는 하지만 김씨의 발언이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인이 지켜야할 이같은 원칙에 비추어 빗나갔다는 느낌에서 비롯된다.
특히 김씨가『힘으로 누르는 것도 한계가 있으며 잘못하면 폭발할 수도 있다』면서『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면 포력을 써서라도 타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고까지 말한 것은 아무리 선의로 생각해도 민주적인 정치인으로 신중한 언동이라고는 보아주기 어렵다.
현재의 정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기준은 입장에 따라, 시각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을 개재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민주적인 절차와 방법에 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민주주의 신봉자라면 더더욱 그래야 한다. 상대방이 비민주적이라고 여기면 그럴수록 개혁의 방법도 민주적으로 하는 것이 민주주의 신봉자의 온당한 처신일 것이다.
그런 방법은 단기적으로는 미온적이라 별 효험이 없는 것같지만 길게 보면 국민적인 호응과 지지를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자신의 주장과 다르다고 해서 포력적인 방법이라도 쓰겠다고 한다면 독선이란 비난을 면키 어렵다.
지금 우리 정치에서 가장 우려하고 경계해야할 것은 혁명이나 구데타 같은 파국이다. 또다시 이 나라에 파국적 상황이 온다면 그것은 단순히 정권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중대문제이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상의 역학관계가 흔들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동안 국민들이 피땀흘려 이룩한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가능성마저 없지 않다.
지도적 정치인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와 같은 파국만은 막아야 한다는 의지가 있어야한다. 그래야만 국민의 정치에 대한 여망에 부응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더우기 김씨의 발언장소가 외국이란 점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김씨의 이번 해외여행목적이 어디있는지는 단치하고라도 국내에서 물어야할 문제들을 딴나라 사람들에게 하소연하는 것은 신뢰있는 정치인들이 취할 정도가 아니다.
외세를 빌어 국내정치의 흐름을 바꾸겠다는 발상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에 대해 모든 정치인들은 생각하는바 있어야 할 것이다.
어차피 앞으로의 정국은 개헌정국으로 뜨거워질 전망이다. 개헌의 논리가 있으면 호헌의 논리도 있게 마련이다.
민주정치란 바로 이런 두개의 상반되는 견해가 의회의 토론과 대화를 통해 조정되는 과정일 것이다. 김씨의 발언이 엉뚱한 방향으로 번져 개헌논의의 본질을 왜곡시키지 않도록 당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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