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340)|제83화 장경근 일기(21)|본지 독점게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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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60년11윌14일>
동쪽으로 빗나가던 배가 얼마쯤 가더니 멎는다. 어둠 속이지만 사람들을 태우는 모양이 희미하게 보인다. 우리들 셋만을 태우기로 했던 밀항선이 다른 사람들을 태우고 있다. 밀항선임을 확인한 기쁨보다 배신당한 분노가 한결 더하다.
밀수사건 때문에 경비가 엄하다느니, 배가 고장이라느니 한건 모두 기왕 가는 길에 몇 사람이라도 더 태워 이익을 보기 위한 수작들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꼬박50시간 우리는 애태웠다. 돌뿐인 무인도에서 두려움과 추위와 불안으로 떨었다. 그렇지만 어쩌랴. 이제라도 약속대로 밀항선을 움직여준 것만도 천행으로 김사할 밖에 없다.
밀항선이 다시 우리 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다가온다. 배의 기계 소리가 유난히 크다. 빨리 오르라는 재촉을 받으며 정신없이 배에 올랐다. 선원이 뚜껑을 열고 구멍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들어가 보니 60세 가량의 한 노인이 누워 있다. 머리를 들면 뚜껑이 들리니 누워 있으라고 한다. 일본제 신형 기계선이란 거짓말이고 낡은 생선 운반선 같다. 구멍들은 생선을 보관하는 곳인 듯 했다. 좁은 공간에 세 사람을 집어넣어 팔다리를 펴기가 어려울 만큼 비좁다. 그 위에 소변도 그 자리서 홈을 타고 나가게 하란다. 생선 냄새와 지린내로 견딜 수가 없다. 얼마 안가 양말·바지 순으로 젖어 온다.
몸을 꼼짝달싹 할수 없다. 명령복종을 몇 차례인가 강조했던 선원의 발소리가 머리 위에서 멎더니 또 다른 명령이 떨어진다. 시간을 몰라 항해하기에 불편하니 시계를 달란다. 내가 시계를 푸니 만순이 내손을 누르고 그녀가 차고 있던 론진 시계를 내준다. 어차피 뺏기는 건데 한 푼이라도 값이 덜 나가는걸 뺏겨야 한단다. 아니나 다를까 선원은 다른 구멍에 가서 같은 방식으로 시계를 빼앗는다. 그들 선원에게 운영을 맡긴채 이끌려 가서 그들이 지 정하는 곳에 떨어뜨려질 수밖에 없는 밀항자라는 약점과 공포감을 이용해 귀중품을 약탈하는 해적 행위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눈을 감으니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지금쯤 경찰이 오고 아이들도 이것 저것 문초를 당하겠지. 이런저런 집 모습이 떠오르며 눈물이 방울진다.
또 얼마가 지났을까 머리 위에 발소리가 멎는다. 그는 자신이 선장이라고 했다. 늦게 출항해 미안하다면서 약속과 달리 다른 밀항자를 태운 경위를 말한다. 요컨대 양해를 구한다는 뜻의 얘기다. 기정사실로 만들어 놓고 현해탄 한복판에서 양해를 구하는건 의미가 없지만 처음으로 들어보는 부드러운 소리다. 극도의 피로로 대답할 기력도 없다. 설혹 따질 기력이 있다 해도 감정만 상하게 해 역효과를 낼뿐이다. 나는 그말엔 아무 말 않고 약속대로 오꾸라 해안에 어김없이 배만 대달라고 부탁했다. 선장은 그 점 염려 말라고 한다.
긴장이 풀린 탓일까 아픔이 온다. 정신만은 또렷한데 이대로 잠들어 영영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전신의 마비증세가 온다. 추위도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 것도 생각하기 싫다. 기계선의 엔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 내가 아직은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데다 불기라곤 없는 배 바닥이다. 만순은 오들오들 떨면서도 축 처져 있는 내가 걱정인 모양이다. 내게 가만가만 말한다. 승무원은 선장·기관장·가판장 해서 셋뿐이다. 밀항자를 더 많이 태우느라 그랬는지 선원은 최소인원이다. 아마 우리말고 밀항자는 10명쯤 되는것 같다는 얘기다. 역시 이런 때는 여자들의 감각이 날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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