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가빴던 '롯데 압수수색 작전' 24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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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밤 11시 서울 양평동 롯데홈쇼핑 사옥에서 검찰 수사관들이 압수한 경영자료를 싣고 나오고 있다. [사진 독자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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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밤 11시 서울 양평동 롯데홈쇼핑 사옥에서 검찰 수사관들이 압수한 경영자료를 싣고 나오고 있다. [사진 독자제보]

“휴대전화는 꺼서 이리 주시고, 전부 자기 자리에 앉으세요.”

지난 10일 오전 8시 서울 소공동 롯데쇼핑센터빌딩. 롯데그룹 정책본부와 호텔롯데·롯데백화점 본사 등이 입주한 이 건물에 검찰 수사관 200여명이 들이닥쳤다. 수사관들은 각 부서별로 휴대전화를 수거한 뒤 컴퓨터 자료 복사와 책상 위 서류 수거 등을 진행했다.

컴퓨터 복사에서 걸림돌은 ‘USB’ 였다. 롯데그룹은 자료의 외부 유출을 막기 위해 사내 컴퓨터에서 USB를 사용하지 못하게 막아놨다. 이를 푸는 데만 몇십 분이 걸렸다. 이후 컴퓨터 자료 복사 중에는 검사나 수사관이 직원의 자리에 앉고, 해당 자리의 원래 주인인 임직원은 보조의자로 옆에 앉아 압수수색 과정을 지켜봤다.

검찰은 아직 롯데쇼핑센터 건물 구조에 익숙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검사와 검찰 수사관들은 층별로 어떤 사무실이 있는지를 살펴본 뒤, 관련 사무실에 들어가 롯데 임직원을 통제했다.

“여기는 어떤 부서냐”고 물어본 뒤, 자금 흐름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되면 “일단 자리에 앉으라”면서 정리를 하는 식이었다. 롯데쇼핑의 한 임원은 “그래도 점잖게 인사를 한 뒤 사업 자료들을 압수했다”고 전했다.

검찰은 롯데호텔 신관 34층에 있는 신격호 총괄회장실과 롯데쇼핑센터 26층에 있는 신동빈 회장실도 수색했다. 26층에 올라가면서는 검찰과 롯데 직원들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있었다.
롯데쇼핑센터의 엘리베이터는 1층에서 24층까지 이동이 가능하고, 재무팀이 있는 지원실(25층), 회장실과 황각규 사장실 등이 있는 26층 등 ‘로열층’을 가려면 24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갈아타야 한다.

하지만 24층에는 인가된 사원증을 태그해야 열리는 문이 있고, 25~26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도 인가된 사원증을 태그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검찰 수사관 몇 명이 지나가는 임직원에게 “당장 문을 열라”고 소리를 치면서 시비가 붙었다고 롯데 관계자는 전했다.

같은 시각 시작된 서울 양평동 롯데홈쇼핑, 가산동 롯데정보통신·롯데피에스넷, 잠실 롯데시네마, 남대문로 대홍기획 등의 압수수색은 차분하게 진행됐다. 하지만 롯데시네마·대홍기획 등 일부 계열사 임원들은 사태를 뒤늦게 파악하고 귀사하기도 했다.

압수수색은 롯데의 주요 행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롯데백화점 본점은 우선 10시 30분 예정된 ‘프렌치 위크’ 오픈 행사부터 취소했다. 롯데백화점 차원에서 프랑스 관련 상품을 최대 70% 할인하는 행사로, 이날 오픈식에는 파비앙 페논 주한 프랑스 대사가 참석할 예정이었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압수수색 소식이 알려진 직후 기자 100여명이 건물 주위에 나타나 행사를 취소했다”고 설명했다.

신격호(95) 총괄회장과 신동빈(61) 회장은 이날 압수수색을 당하는 화는 피했다. 신격호 총괄회장은 고열을 이유로 9일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신동빈 회장은 한국스키연맹 회장 자격으로 멕시코 칸쿤에서 열리는 세계스키대회 총회에 참석 중이다.

신격호 총괄회장은 아직 롯데그룹의 압수수색 소식을 보고받지 못했다. 신동주(62) 전 부회장 측 정혜원 SDJ코퍼레이션 상무는 “아픈 부모님께 슬픈 소식을 전할 수 있겠느냐”고 설명했다.

하지만 신 총괄회장은 신영자(74)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의 금품 수수의혹과 검찰 조사에 대해서는 보고를 받고 “속상하다”고 했다고 정 상무는 전했다.

검찰은 신동빈 회장이 머물고 있는 평창동 자택에서도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검찰은 관리사무소 측에 압수수색 영장을 제시한 뒤 열쇠공을 불러 문을 따고 들어갔다. 하지만 허사였다.
현장에서 만난 경비는 “신 회장이 이 곳에 살지 않은 지 2년 정도 됐다”면서 “집 안에는 TV와 침대 정도 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압수수색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끝났다. 밤 11시가 넘어서자 소공동 롯데쇼핑센터 3층 주차장과 양평동 롯데홈쇼핑 사옥 로비 등에서 파란색 압수수색 박스를 카트에 쌓아서 나오는 수사관들의 모습이 목격됐다. 10일 오전 8시부터 시작해 꼬박 16시간이 걸린 셈이다.

노병용 롯데물산 사장의 구속영장이 발부된 것은 그로부터 4시간이 지난 11일 오전 4시 30분쯤이다. 한정석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판사는 “(노 사장의)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이 인정된다”면서 영장 발부 사유를 밝혔다. 영장 발부 사실이 TV 화면을 통해 전달되자 롯데그룹 직원들은 참담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만 봤다. 한 롯데물산 임원은 충격을 받은 듯 울먹이며 “억울하고 참담하다”고 말했다.

한편 롯데그룹 측은 이날 전면 압수수색에 대해 입장을 내고 “당면한 현안들이 산적해 있는 때라 몹시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며 “진행 중인 수사에 적극 협조하고, 기업활동이 위축되지 않도록 최대한 정상적인 경영을 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검찰의 전격 수사에 대해 내부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도 적지 않다. 한 계열사 대표는 “그동안 많이 압수수색을 했는데 더 털 것이 뭐가 있느냐”면서 “비자금과는 관련 없다”고 말했다. 롯데그룹 정책본부 임원 역시 “신동빈 회장은 사재를 털면 털었지, 회사 돈을 빼먹을 사람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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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주 “할 말 없다” 말 아껴=신동빈 회장의 친형이자 이번 사태 발발의 주역으로 꼽히고 있는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현 SDJ코퍼레이션 회장)은 성북동 자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신 전 부회장의 가정부는 본지 기자에게 “신동주 전 부회장이 한국에 온 것은 맞다”면서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언제 집으로 돌아오는지 등의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SDJ 측 관계자는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특별히 할 말이 없다”며 말을 아꼈다. 검찰에서는 롯데그룹 비자금 수사와 관련해 신 전 부회장 측이 제출한 자료를 참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현택·유부혁 기자 mdf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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