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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조신하게 살림해, 돈은 내가 벌게” 대세녀 된 김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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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집에서 조신하게 살림하며 뒷바라지 해준 윤정수씨, 감사하다. 꽃집 하나 차려드릴테니 돈 쓰지 말라. 돈은 내가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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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은 지난 3일 제52회 백상예술대상 여자 예능상을 받고 “스무살에 방송국에 들어와 22년 만에 처음 큰 상을 받았다”고 수상소감을 말했다. [사진 양광삼 기자]

제52회 백상예술대상 여자 예능상을 받은 김숙이 지난 3일 시상식에서 한 말이다.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개그우먼답게 수상소감도 웃음을 안겨줬다. 기존 성 역할을 허무는 면모는 윤정수와 가상 부부로 출연 중인 JTBC 예능프로 ‘님과 함께2-최고의 사랑’에서 보여준 캐릭터 그대로였다.

“남자 목소리 담 넘으면 패가망신”
가부장제 뒤집는 말로 재미·웃음
‘여/성이론’ 여름호 특집에도 등장
“새로운 여성 감성 대변하는 현상”

최근 김숙의 활약상과 그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는 ‘숙크러시’, ‘퓨리오숙’ 같은 신조어에서도 확인된다. 각각 여성에 대한 여성의 열광을 뜻하는 ‘걸 크러시(Girl Crush)’, 지난해 개봉한 영화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에 나오는 여성 전사 이름 ‘퓨리오사’에 김숙의 ‘숙’을 합성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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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과 함께2’에 가상부부로 출연 중인 김숙·윤정수. “남자가 돈 쓰는 거 아냐”, “그깟 돈이야 내가 벌면되지” 같은 김숙의 말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큰 공감과 열광을 얻었다는 분석이다. [사진 JTBC]

김숙과 연관된 신조어라면 ‘가모장(家母長)숙’도 빼놓을 수 없다. “남자는 조신하게 살림 잘하는 남자가 최고”, “어디 남자가 아침부터 인상을 써”, “남자 목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패가망신한다는 소리가 있다” 등등의 말은 ‘님과 함께2’ 시청자라면 귀에 익다. 가부장제 전통에서 여성을 향해 곧잘 쓰이던 말, 하지만 여성들이 결코 동의하지도 듣고 싶지도 않던 말에 ‘여자’ 대신 ‘남자’를 넣는 김숙의 화법은 위협감·거부감이 아니라 재미와 웃음을 낳는다.

마침 김숙과 더불어 박나래·장도연·이국주 등 여성 개그맨들이 예능에서 보여준 활약은 지난해부터 방송가의 화제로 떠올랐다. 최근에는 JTBC’마녀를 부탁해’ 같은 웹콘텐트만 아니라 KBS2 ‘언니들의 슬램덩크’처럼 지상파에서도 여성만으로 주요 출연진을 구성한 예능이 등장했다.

최근 나온 ‘여/성이론’ 여름호는 ‘개그/우먼/미디어’를 주제로 기획특집을 마련해 이에 대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했다. 필자 가운데 심혜경(천안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씨는 김숙의 이름에 나오는 ‘맑을 숙(淑)’자부터 주목한다. “1980년대만 해도 매우 흔한 한국 여성의 이름이자 ‘요조숙녀’같은 단어에서 풍겨 나오듯이 맑고, 착하고, 아름답고, 단아한 현모양처가 되기를 기원하며 딸에게 지어주던 이름, 그러니 한국 여성 일반을 지시한다 해도 무리랄 것 없는” 이 이름이 김숙을 통해 “2016년 한국의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여성의 신념과 새로운 감성을 대변하고 있는 현상이 되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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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과 함께2’에 가상부부로 출연 중인 김숙·윤정수. “남자가 돈 쓰는 거 아냐”, “그깟 돈이야 내가 벌면되지” 같은 김숙의 말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큰 공감과 열광을 얻었다는 분석이다. [사진 JTBC]

특히 ‘님과 함께2’의 김숙·윤정수 커플이 기존의 가상 결혼 프로와 딴판으로 시작부터 ‘쇼윈도 부부’를 자처하는 동시에 ‘집에서 살림하는 여자/밖에서 돈버는 남자’라는 이분법을 비롯해 고정된 성역할을 허무는 점을 주목했다. 일반화된 성적 정체성과 남녀 구분을 허무는 이같은 방식은 ‘젠더 벤딩(gender bending)’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 거울에 반사하듯 시각을 반대로 되돌려 준다고 해서 ‘미러링(mirroring)’으로 불리기도 한다.

필자 심씨는 이것이 “어떤 흐름을 파악해 자신을 영악하게 마케팅”하는 전략이 아니라 “그 자체가 진즉에 이상형을 ‘집에서 조신하게 살림 잘하는 남자’라고 밝혀왔던 김숙의 성격이자 살아온 역사”라는 점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여성 시청자들이 열광한다는 지적이다.

또 다른 필자인 손희정(여성문화이론연구소)씨는 퓨리오숙의 등장을 파퓰러 페미니즘(popular feminism)의 틀, 즉 대중문화의 통속성·대중성을 통해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탐구해온 짧지 않은 흐름 속에서 조명한다. 또 양경언(여성문화이론연구소)씨는 미러링에 초점을 맞춘다. 그에 따르면 기존 통념이나 상대의 시각을 패러디하는 방식은 인터넷상의 여성혐오 발언을 미러링해 화제가 되어온 사이트 ‘메갈리아’ 처럼 요즘 시대에 국한된 게 아니다. 1920년대 잡지 ‘신여성’에 차례로 실린 ‘여학생의 아홉 가지 잘못’이란 글과 그 형식을 고스란히 희화화해 비교한 글을 그 예로 제시했다.

글=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사진=양광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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