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자주찻던 사적들 지금도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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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내가 마지막으로 평양에 간 것은 해방되던 해 가을이다. 당시 경성제대 재학중에 해방을 맞이하여 정신없이 한달을 지내다가 이미 갈라진 38선을 넘어가야 했다. 평양은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었고, 적위대의 상엄한 경계밑에 있었다.
우리집은 신양리에 있었는데 신양리에서는 만수대위에 있는 평양고보(중도에 평이중으로 개칭)까지 걸어서 통학할수 있는 거리다.
만수대에서 모란봉까지도 걷기에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다. 만수대와 모란봉 사이로 평양시가 남북으로 뻗어 있으니 만수대에서 북쪽 언덕으로 내려와 거리를 건너면 곧 모란봉지대로 들어간다.
해방후의 짤막한 귀향중에 인상깊었던 일은 신사 참배로 굳게 닫혔던 산정현교회가 다시 열린 장면이었다. 내가 갔던 주일은 바로 순교군 주기철목사의 뒤를 이어 한상동목사가 7년 옥고끝에 강단에 서는 첫 주일이었다.
7년전에 일경에 항거하여 문닫히는 마지막 주일에 참석하였었기에 더욱 인상적이었다.
평양의 모든 언덕 외에는 예배당들이 우뚝우뚝 솟아있었다. 그러므로 일제탄압 이전 주일에는 온시가가 교회 종소리로 차 있었다. 그 큰 예배당들은 지금 무엇으로 쓰고 있을까. 서문밖 장대재·산정현·사창골 교회들이.
신양리 우리집에서 동쪽으로 조금가면 마포기념관·맹아학교, 거기서 조금더 가면 숭실대강당·숭실전문·숭보고보·평양신학교 등의 캠퍼스지대였다. 그 학교들은 지금 어떻게 되였을까?
내가 평양엘 간다면 찾아보고 싶은 곳 또 하나는 부벽누쪽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는 관암묘이다. 그곳 사적의 뜻을 알아서라기보다 그곳에 우뚝우뚝 서있는 장수들의 큰 조각상들을 구경하기 위해서 있었으나 이제 그런 것들이 남아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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