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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월요일] 혼밥족 뷔페, 재즈 흐르는 레스토랑…‘속세’로 내려온 사찰음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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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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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오전 11시30분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위치한 음식점 ‘삼소’의 출입문은 쉴 새 없이 여닫혔다. 20대 회사원에서 푸른 눈의 외국인,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까지 고객층도 다양했다. 정오가 되기도 전에 96개 좌석이 모두 들어찼다. 도라지볶음·호박볶음·콩자반·꾸지뽕장아찌 등 쟁반에 음식을 담는 손놀림이 분주했다. 하지만 여느 뷔페 식당이라면 반드시 있을 법한 갈비, 회, 간장게장 등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인기가 많은 음식점치곤 공기도 심심했다. 후각을 자극할 법한 냄새가 전혀 없었다. 새삼 이곳이 사찰음식 전문 뷔페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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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음식점 삼소는 점심시간에 뷔페를 운영한다. 매일 다른 7~10가지 반찬을 내놓는다. [사진 전민규 기자]

사찰음식은 2000년대 중반 불기 시작한 ‘웰빙’ 열풍을 타고 산속 사찰에서 도심 속으로 들어왔다. 콜레스테롤과 지방 수치에 민감해진 도시인들은 ‘기름’을 쏙 뺀 사찰음식에 큰 호기심을 보였다.

도심 파고드는 ‘공양’

불교의 종교적 수행 목적으로 승려들이 만들어 먹는 사찰음식은 고기와 우유·계란을 사용하지 않는다. 불교에서 금하는 다섯 가지 채소인 오신채(파·마늘·달래·부추·흥거)도 넣지 않는다. 수행을 위해 기름지고 자극적인 맛을 없앴다. 육수에는 멸치도 안 넣는다. 표고버섯·무, 각종 채소를 넣어 우려낸 물을 음식에 사용한다. 다이어트·필라테스·명상요법·무용인·면접을 앞둔 취업준비생 등이 한번쯤 정보를 찾아보는 음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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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사찰음식점 ‘고상’의 송수미 대표는 “호기심에서 멈췄다. 사람들이 여전히 사찰음식을 소수만 먹는 특별한 음식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대만큼 매출이 오르지 않아 사찰음식점은 문을 닫거나 일반 한식점으로 재단장했다. 남은 사찰음식점들도 ‘대중화’를 위한 혁신이 불가피했다. 가격을 낮추고 종교 색채는 줄이는 방식으로 조금씩 변신을 시도했다.

조계사에서 직영으로 운영하고 있는 ‘삼소’는 점심형 뷔페라는 콘셉트로 대중화에 성공한 사례다. 원래 ‘발우공양 콩’이라는 사찰음식점이었던 이곳은 지난해 7월 가격을 낮춘 뷔페식 사찰음식점으로 바꿔 재개장했다. 가격은 8000원. 1만원도 안 되는 가격으로 각종 사찰음식을 맛볼 수 있다. 뷔페 메뉴는 매일 다르다. 반찬은 7~10가지를 내놓는다. 점심시간과 저녁(오후 5시~8시30분) 시간에 제공되는 단품 메뉴도 있다. 능이메밀국수(9000원) 같은 저가 음식이 인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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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튀김과 올리브유에 볶은 토마토·단호박 등이 어우러진 사찰음식점 고상의 ‘온새미로’. 정갈한 플레이팅과 곁들여진 유자소스가 풍미를 더했다. [사진 전민규 기자]

조미영 삼소 매니저는 “종로 인근의 직장인들이 즐겨 찾는다”며 “저렴한 가격에 특별한 한식을 경험하고 싶은 외국인도 많이 온다”고 소개했다. 도시의 ‘혼밥족’(홀로 밥 먹는 사람들)도 배려했다. 음식점 한쪽에 바깥 풍경을 보며 식사할 수 있는 혼밥족용 테이블을 마련해 뒀다. 조 매니저는 “채식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섞여 함께 식사하기 힘들기 때문에 혼자 찾아 오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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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담근 무짠지를 채썰어 만든 견지동 발우공양의 ‘무짠지 메밀국수’. [사진 전민규 기자]

아예 내부 구조를 바꾼 곳도 있다. 2009년 6월 문을 연 견지동의 ‘발우공양’은 3개월간의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지난 1월 새로이 오픈했다. 대청마루 형식의 좌식 스타일이었던 실내가 11개 룸(room) 형식으로 바뀌었다. 10개 룸은 의자를 놓았다. 김유신 발우공양 총괄부장은 “양반다리를 어려워하는 외국인과 무릎이 좋지 않은 노년층을 위해 의자 형식으로 바꿨다”고 말했다. 김 총괄부장은 “손님 중 3분의 1 정도가 외국인이고 특히 중·일 손님이 많다”고 말했다. 이곳은 네 종류의 코스 요리(3만~9만5000원)를 내놓는데 계절에 따라 한 해 네 차례 메뉴를 전부 바꾼다.

서울 중구 수하동의 ‘고상’도 외국 관광객들의 취향 잡기에 나서고 있다. ‘1인 파인 다이닝’이라는 콘셉트를 잡고 모든 반찬을 개별 그릇에 담아 준다. 송수미 고상 대표는 “외국인들은 음식의 맛과 양 못지않게 시각적 만족이 중요하기 때문에 플레이팅에 각별히 신경 쓰고 있다”고 말했다.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연잎연꽃잡채’라고 한다. 최근에는 ‘할랄’처럼 재료의 처리 방식에 민감한 이슬람 국가의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고상은 지난해부터 육류가 들어간 ‘실크로드’ 메뉴도 만들었다. 감초·당귀 등을 우린 물에 삶은 돼지고기 수육이 주 메뉴다. 송 대표는 “워낙 육류를 찾는 손님이 많아 코스 메뉴로 내놓게 됐다”며 “대신 저염(低鹽)과 오신채 배제라는 기본 조리 방식을 유지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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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주얼 레스토랑 분위기의 방배동 마지 2층 실내 모습. 종교음식 전문가 과정 등이 열린다. [사진 마지]

강남 주민을 타깃으로 대중화를 시도한 곳도 있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자리 잡은 사찰음식점 ‘마지’다. 메뉴판을 열기 전까지는 사찰음식점이란 생각을 하기 어렵다. 식당에 들어서면 은은한 채광 아래 서양식 테이블이 보이고 벽 한쪽의 스피커에서는 트렌디한 팝·재즈 음악이 흘러나온다. 외관만 봐서는 이탈리아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캐주얼 레스토랑 같다. 김현진 마지 대표는 “사찰음식 자체는 전통을 따르지만 음식점 분위기만큼은 누구나 부담 없이 찾을 수 있게끔 모던하게 꾸몄다”고 말했다.

이곳의 ‘대중화’ 시도는 또 있다. 도시락 메뉴다. 마지연밥도시락(8000~1만5000원), 묵은지 덮밥(7000원), 도담 두부 도시락(7000원) 등 다양하다. 김 대표는 “강남 지역에는 건강을 위해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주 5일 내내 도시락을 시켜 먹는 손님이 꽤 된다. 그래서 매일 다른 반찬을 제공한다”고 소개했다. 단체 수요가 늘어나 최근에는 케이터링 서비스도 제공하기 시작했다. 주로 학회나 강좌, 혹은 성당·교회에서 단체 주문이 들어온다고 한다.

한발 더 나아가 공연까지 선보이는 사찰음식점도 있다. 인사동 문화의거리에 있는 ‘산촌’은 매일 오후 8시부터 실내 중앙 27㎡ 무대에서 45분간 전통공연을 펼친다. 무용수들이 나와 승무·바라·부채·북춤을 연이어 선보인다. 공연 마지막엔 무용수들이 손님들에게 꽹과리·소고 등을 쥐여 주고 무대를 돌기도 한다. 산촌을 운영하는 정산 스님은 “음식점을 찾는 손님의 70%가 외국인”이라며 “한국 사찰음식과 함께 전통 문화도 알리기 위해 무용 공연을 37년 동안 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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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사찰음식점은 사찰이 직영하거나 불교 신자들이 운영했다. 하지만 건강식으로 대중화를 꾀하면서 일반인이 문을 여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김윤진 마지 대표는 미국 대학입학자격시험(SAT) 수학 강사로 일하다 대학원에서 불교 윤리와 음식을 공부한 계기로 사찰음식점을 열었다. 송수미 고상 대표는 “아토피로 고생하는 아들에게 먹일 음식을 찾다가 이렇게 사찰음식점까지 열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종교가 없다.

음식상식 ‘발우’ 중 가장 작은 건 아귀에게 공양하는 ‘시식 발우’

승려의 식기인 ‘발우’는 4~5개로 짝을 이룬다. 크기가 조금씩 다르다. 가장 큰 발우는 ‘어시 발우’ 또는 ‘불(佛) 발우’라고 부르며 밥을 담는다. 다음 크기는 ‘국 발우’ ‘천수 발우’ ‘반찬 발우’ 순이다. 5개로 이뤄진 발우 중 가장 작은 발우는 지옥·아귀·아수라에게 공양하기 위한 ‘시식 발우’다. 가장 큰 밥그릇에 나머지가 크기대로 차곡차곡 들어간다.

글=조한대 기자 cho.handae@joongang.co.kr
사진=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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