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책 속으로] 민초가 늘 쓰는 ‘솥에 산’ 소태산…가장 큰 수행처는 ‘일상’이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기사 이미지

소태산 평전
김형수 지음
문학동네
460쪽, 1만6500원

소태산(少太山). 본명은 진섭이고, 나중에 ‘중빈(重彬)’으로 바꾸었다. 올해 개교 100주년을 맞은 민족종교 원불교의 창시자. 그에 관한 첫 평전이 나왔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저자 김형수는 소태산 탄생지인 전남 영광과 금산사, 원불교 총부와 영산성지 등을 수 차례씩 답사하고, 온갖 자료를 섭렵한 끝에 ‘소태산의 생애’를 되살렸다. 덕분에 소태산의 삶이 소설식의 스토리텔링으로 펼쳐진다.

소태산은 1891년에 태어나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다가 1943년에 몸을 벗었다. 평전은 시대적 배경을 아는데 입체적인 도움을 준다. 수운 최제우를 비롯한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증산도의 강증산이 민초들에게 미쳤던 영향 등을 따라가면서 ‘소태산 개벽사상’의 젖줄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를 보여준다.

소태산이 수운의 묘를 찾은 적이 있다. 한참 묵념을 하던 소태산이 제자들에게 말했다. “자기 묘 앞에 자기가 절을 하는 것을 보았나?” 이를 두고 후대 사람들은 ‘소태산은 수운의 환생이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한다. 소태산의 물음은 그런 차원을 넘어선다. 소태산은 수운의 주인공과 자신의 주인공이 둘이 아님을 설한 것이다. 깨달음의 당처(當處)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밥을 지을 때 늘 솥을 썼다. ‘잠시 쓰는 시루가 아니라 늘 쓰는 솥단지에서 살았던 사람’이라 하여 ‘솥에 산’을 한자로 음사한 게 ‘소태산’이다. 그래서 원불교는 생활불교를 지향한다. 가장 큰 수행처가 일상이다. 소태산은 이런저런 이적도 보였다. 증거물을 남겨서 후대에 전하자는 제자들을 향해 소태산은 늘 “태워서 버리라”고 했다. 그것이 종교의 본질이 아닌데도, 사람들이 혹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무한한 적음(少)과 무한한 큼(太)을 동시에 품는 산(山). 그가 바로 소태산(少太山)이다.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