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규모는 토끼, 질은 거북이 걸음|해방40년 영화.연극.가요.어떻게 달라졌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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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광복을 맞으면서 한국 영화계는 길고 답답했던 동면기를 벗어나 대중예술로서 크게 각광받으며 새롭게 꽃피기 시작했다.
46년 최인규감독이 고려영화사를 설립, 한독립투사의 지하운동을 그린 영화 『자유만세』는 국민들의 절대적 공감을 얻으며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한국영화의 장래에 청신호를 보여주었다.
이후 지금까지 만들어진 한국영화는 줄잡아 3천6백여편에 이르며 3백45명이 감독으로 데뷔했다 (영화진흥공사 집계).
48년 정부수립을 고비로 서서히 예술성 있는 멜러드라머들이 선보이기 시작, 홍성기감독이 최초로 컬러영화 『여성일기』를 데뷔작으로 내놓은것이 49년이다.
6·25동란으로 좌절했던 영화계는 일련의 전쟁영화를 내놓은데 이어 50년대 후반부터 활발한 제작활동을 보이며 60년대로 이어지는 중흥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규환 감독의 『춘추전』(55년)이 10만관객을 동원, 크게 히트했으며 이후 『자유부인』 (55), 『피아골』(55), 『백치아다다』(57), 『장마루촌의 이발사』(59)등 우수작들이 줄을 이었다.
유현목감독의 『오발탄』이 개봉되면서 문이 열린 60년대는 흥행의 성공에 힘입어 영상미학과 실험정신이 꽃핀 한국영화의 중흥기였다.
『사랑방손님과 어머니』(61), 『돌아오지 않는 해병』(63), 『잉여인간』(64), 『벙어리 삼룡이』(64), 『만추』(66), 『장군의 수염』(68), 『미워도 다시 한번』(68)등 의욕적인 예술정신이 결실을 거둔 한국영화계의 대표작들이 이 당시에 쏟아졌다.
70년대 영화계는 젊은이 취향의 영화들이 발표되면서 흥행에도 크게 성공했다.
77년 개봉돼 서울에서만 58만5천명의 관객을 끌어들여 한국 영화사상 최고의 기록을 세운 김호선 감독의 『겨울여자』를 비롯해 『별들의 고향』(74), 『영자의 전성시대』(75), 『바보들의 행진』(75), 『바람불어 좋은날』(79)등 일련의 「젊은 영화」들이 각광 받았다.
80년대 들어서는 예술성과 오락성을 함께 추구하는 철저한 프로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같은 경향은 에로티시즘의 팽배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접근으로 나타났다.
『애마부인』(82)등 강한 에로영화와 『고래사냥』(84)등 현실비판 성향의 작품들이 주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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