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의 길을가다(22)|장군만 다니는 특설 3개주교를 건너다.|배 수백척.8백여마을 동원. 가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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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오오가끼(대원) 에서 통신사 일행의 다음 숙박지였던 나고야(명고애) 까지는 지금의 동해도본선으로 44km다. 급행열차로 35분이 걸린다.
신유한공이 나고야로 갈 때는 새벽에 오오가끼를 떠나 황혼녘에야 도착할수 있는 꽉찬 하루길이었다.
오오가끼와 나고야 사이에는 3개의 강이 나란히 서쪽에서 동쪽으로 횰러 태평양으로 들어간다.
오오가끼시 바로 옆을 흐르는 강이 폭1백m 이비가와(읍비천), 가운데가 폭l백20m의 나가라가와(외량천), 그리고 나고야에 가장 가까운 폭이 폭2백m의 기소가와 (목증천)다.
일본 혼슈(본주) 의 지형은 대체로 우리의 동해쪽으로 높은 산맥이 남북으로 달리고 있어 태평양쪽에 평야가 발달했다. 따라서 강이나 개천은 대부분 서쪽산맥에서 시작되어 동쪽 태평양으로 흘러 들어간다.
통신사 일행이 왕복했던 도오까이도(간해사)를 따라 동경까지 가는 사이에도 무수한 대소의 강이 길을 가로지르고 있다.
지금은 강이나 개천마다 몇개씩 다리가 놓여 그 위를 신간선·전철·자동차가 씽씽달리고 있지만 에도시대에만 해도 사정이 달랐다.
「도꾸가와」(덕천)막부는 봉건영주들의 반란에 대비, 에도로 들어가는 길목의 강에 다리를 놓는것을 엄금했다. 도오까이도를 가로 지르는 무수한 강을 천연의 방어선으로 이용한 것이다.
그대신 막부장군이 교오또(경도)를 방문할때와 에도시대를 통해 최대의 성의로 맞아들였던 조선통신사가 왕래할때만은 주교를 놓도록했다.
주교란 배를 일렬로 띄우고 그위에 판자를 깔아 임시로 다리를 놓은 것이다.

<봉건영주 반란대비 다리가설 일체엄금>
조선인가도를 이용토록 한것도 그렇지만 조선통신사에 대해 장군만이 이용할 수 있는 주교를 놓도록 한것은 「도꾸가와」막부가 통신사의 방문을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나타내주는 증거다.
오오가끼를 떠난 신공 일행도 나고야까지 가는 도중에 있는 이비가와·나가라가와·기소가와 세개의 강을 모두 일본측이 정성들여 마련한 주교로 건넜다.
『해유녹』을 보자.
『일찌기 떠나 세개의 큰 다리를 지났다. 이 다리들은 모두 용위에 배를 가로 띄워놓고 굵은줄과 쇠고리로 좌우를 엮고 그 표면에는 판자를 깔았다. 양쪽머리에는 각각 아름들이 나무를 세워서 거기에 이것을 매어 놓았다. 이런 다리 가운데 기천교(목증천)가 제일 크다. 배 3백척을이어서 길이가 천여보나 되니 그 공력과 비용을 생각해 볼만하다』
1764년 통신사의 정사 조쇄의 『해사일기』에 따르면 이비가와·나가라가와의 주교는 배1백척을 띄워 만들었다.
통신사 일행과 호송대등 수천명이 주교를 건너는 광경은 당시로서는 일대 장관이었다. 인근에서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양안에서 구경하는 남녀는 낭화강 (정천) 때와 같다. 가마를 타고 발을 치고 오는 자녀들도 있는데 이것은 귀족의 부녀들이라고 한다』고 신공은 『해유녹』에 그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일행이 세번째 다리를 건너 휴식을 취했던 비사이(미서)시의 시사에 따르면 1764년 통신사때 기소가와에 가설됐던 주교의 규모는 배 2백75척 (대선50척, 소선2백75척) , 배위에 까는 판자 3천36장. 다리의 길이 8백55m, 폭 2.7m의 당당한것이었다.

<2년전에 설치준비 3개월간 공사계속>
나고야번은 이 다리를 놓기의해 일행이 도착하기 2년전인 1762년4윌l일부터 기획과 준비에 착수, l763년10월25일부터 다음해 1윌24일까지 3개윌간 공사를 계속한 것으로 돼있다
『옥장 (오와리·명고옥)명소원회』란 기록에는 『장군상락 (상락·경도로 상경하는것) 때와 조선통신사가 올때에는 주교를 가설한다. 그장대한 공사는 실로 해도제일의 장관이라 할수있다』고 주교가설이 엄청난 역사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 공사를 위해 나고야번 영내의 9백15개 마을중 개간등으로 부역이 면제된 곳을 제외한 8백13개 마을에서 인부가 동원됐다.
이렇게 만든 다리는 웬만한 홍수에는 끄떡도 않는 튼튼한 것이었다. 1764년 통신사때는 일행이 오오가끼에서 묵고 있는 동안 큰 비가 내려 출발을 하루늦출 정도였으나 다리는 아무 손상도 입지않아 건너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3개의 주교를 건넌 통신사 일행은 지금의 비사이시에 있는 오꼬시(기) 숙(본진) 앞을 지나 이나바(도섭) 촌을 거쳐 나고야로 들어갔다.
일행이 거쳐간 오꼬시숙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휘서시기숙기념관」이 되어 있다.
기념관에서 멀지 않은 기소가와 강변에는 옛날 주교를 매었던 자리임을 알려주는 높이 2m의 비석이 서있다.
기념관에는 에도시대의 도로망을 그린 옛 지도첩, 주교의 얼개를 그린 그림, 이곳에 묵어간 봉건영주들의 유묵등이 전시돼 있다.
시에서는 이 기념관을 확장하기 위해 옛 건물옆에 새로 2층건물을 지어놓고 있었다.
인구5만5천명의 조그만 도시비사이시가 향토의 유적·유물을 소중히 보존하고 기념관을 만들어 널리 자랑하는것이 인상적이었다.
취재팀은 통신사의 노정을 장시 벗어나 일행이 왕래한 길에서 북쪽으로 띨어져 있는 기후(기부) 시를 찾았다. 이곳의 역사박물관을 가보기 위해서였다.

<조공사 취급 일인의 잘못된 사관을 지적>
기후시는 지금은 기후현의 중심지가 돼있지만 에도시대에는 폐성처분을 받았던곳이다.
일본천하를 다루는 1600년의 세끼가하라 (관원) 전투에서 「도요또미」군의 편에 서서「도꾸가와」 군에 대항한 때문이다.
역사박물관은 시의 동북 금화산밑에 새로 지은 3충건물로 규모가 컸다. 비사이시에서도 느낀것이지만 작은 지방도시가 이런 규모의 역사박물관을 갖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제2자료과장 「모리세」씨의 도움으로 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주교의 그림·설계도등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을수 있었다.
이곳에서 미국 일리노이대학의 역사학과 조교수「로널드·토비」박사와 만났다.
그는 『근세 일본의 국가와 외교』 라는 책을 미국과 일본에서 출판한 일본 외교사 전공 학자다. 한일관계사, 특히 통신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의 대학교수가 물론 자기의 전공이라고는 하지만 일본의 지방도시까지 찾아 다니며 역사공부를 하는데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토비」씨는 일본의 대외정책의 바탕에 전통적으로 중국의 중화사상과 비슷한 일본식 중화사상이 깔려있다고 지적하고 조선통신사도 막부가 정통성을 인정받기위해 불러들였다는 주장을 폈다.
통신사를 조공사로 보려는 일본인들이 있음을 여러차례 보아왔으나 제3국인 미국학자가 일본의 잘못된 통신사관을 답습하고 있음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토비」교수와의 우연한 대화는 여러모로 통신사의 발자취를 더듬는 여정에 착잡한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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