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풍상 1500여년…거비가 진실을 말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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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재일사학자 이진희교수(일 명치대)는 지난 1일부터 12일까지 한국학자로는 최초로 만주 집안현의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비를 현장 답사하고 돌아왔다. 4, 5세기 한·중·일 고대사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일컬어지는 이 비를 면밀히 조사한 이교수는 『역시 일제에 의한 변조 흔적이 역력했다』고 말하고 『구체적으로 8군데에 석회를 발라 메우고 첨삭하는 등 손질을 했다』고 자신의 종래 주장을 재확인했다. 본사는 이교수가 직접 쓴「광개토대왕비현장답사기」를 긴급 입수, 앞으로 4회에 걸쳐 이를 생생한 컬러사진과 함께 독점게재 한다.
긴 터널을 지나니 시야가 확 트여 차창밖에 평지가 전개 됐다. 고구려의 옛 수도 집안(오늘의 집안) 땅이다. 평야 건너편에 보이는 산들은 북한땅. 산 밑으로 흐르는 압록강이 가까와진다.
7월3일 상오11시55분 집안역에 도착, 『드디어 왔구나』하는 감동이 가슴에 북받쳐 오른다. 집안을 찾는 노정은 나에겐 너무나도 먼길이었다.
졸업논문「고구려 벽화고분의 연구」를 준비한 것이 32년전, 광개토대왕능비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지 13년, 그동안 「현지답사」의 꿈을 버린적은 없었다.
요미우리(독매) 신문사가 지난 1월 중공학자 3명을 초빙하여 심포지엄을 주최한데 이어 「호태왕비학자참관단」(일행10명) 을 준비한 것이 지난5월.
그러나 중공정부의「입국비자」는 출발 수일전에 겨우 나왔던 것이다. 국교관계가 없는 한국국민이기 때문이다.
집안행은 한편으로는 고행이었다. 나리따 공항을 떠난 것이 7월1일 상오9시20분, 일본열도와 황해를 횡단하여 상해상공서 기수를 북쪽으로 돌려 북경공항에 하오1시10분 (한국시간하오2시10분) 에 도착했다.
그리고 북경참(역)을 하오3시40분에 떠난 급행열차는 다음날 상오6시45분 장춘에 도착, 열차를 바꿔 통화까지 10시간반, 그리고 다시 완행열차로 3시간40분을 가야했었다. 북경서 집안까지만도 29시간이상 열차에 몸을 맡겨야 했는데 열차의 진동때문인지 요통까지 동반되었었다.
7월3일 하오, 필자는 광개토대왕능비앞에 서 있었다. 414년에 세워진 높이 6·4m의 거비,오늘까지 1천5백70여년간 그는 고구려왕조의 멸망을 체험했었고 여진족을 치는 이성계군을 목격하기도 했다. 19세기 후반에는 화상 (이끼등을 제거하기 위한) 을 입었고 「석회칠과 비문의 변조」라는 치욕까지 당하였다. 또한 금세기에는 망국의 비애도 겪어야 했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일들을 초월한 듯 태연한 자세로 맞아주었다.
비문이 일본에 알려진 것은 1백2년전인 1883년 가을, 일본군 「사꼬」 중위에 의해서였다. 일참모본부는 이를 해독·해석하여 학계에 제공했다. 그리하여 비문의 「왜이신묘연내도해파백잔□□□나이위신민」을「왜(대화정권)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제)과 □□,신나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라는 해석이 정설로 돼 「임나일본부」 설의 근본사료로 활용해 왔었다.
13년전인 1972년4월이었다. 필자는 10여년에 걸쳐 연구한 성과를 발표, 비문의 일부가 참모본부에 의해 「변조」됐으며 따라서 비면에 대한 과학적인 공동조사가 불가피하다는 것, 「임나일본부」설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한다는 것을 제기하였다. 그후 수년동안 일본의 여러사람들이 반론에 나섰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지난해 현지조사한 왕건군씨(길림생 고고·문물연구소장)의 변조부정설이 나오자 독매신문이 그를 초빙, 심포지엄을 열었던 것이다. 이번 광개토대왕능비 참관은 비면을 답사한 뒤 장춘에서 다시 심포지엄을 열자는데 목적이 있었다.
비앞에 선 필자는 냉정했었다.
사진촬영 (세부까지) 을 마친 다음 세부검토에 착수, 확대경으로 문제되는 곳을 세밀히 조사하여 수첩과 지참한 탁본사진에 기록하였다. 예컨대 제1면 3행 41자는 필자의 주장대로 「황」자가 아니라 「시」의 자획으로 확인되었다.
이 글자는 「사꼬」가 전한 비문에도 「황」 이었고 왕씨도 이 글자에 틀림없다고 한 것인데 사실은 열면상에 있어 석회가 자획의 오른쪽상단 모서리로부터 왼쪽 아래 모서리에 걸쳐 남아있고 원비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왕씨의 주장과는 달리 상기한 자획만이었다.
한일관계사연구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온 「신묘연내도해파백잔」의 구절은 비의 상단에있어 정확히 판독하기 어려웠으나 망원경으로 확인한 바에 의하면 「해」로 되어온 곳은 필자의 종래 주장대로 「명」의 자획이었으며 「도」도 확실치 않았다.
이곳은 1964년에 작성한 장명선탁본 (집안현박물관소장)도 같은 특징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가 확인한 범위에서만도 「임나일본부」설은 결정적 근거를 상실한 셈이다.
다음으로 몇가지 올린다면 제2면5행의 「잔주왕제」의 「주」는「왕」자였고, 6행「조맹논사회「논」은 凹면에 있고 「논」으로 볼수는 없었다. 다음은 9행 「추지임나가나」의 구절인데 위에서 수직으로 내려오는 열면상에 위치하고 있어 「임」의「인」변, 「나」의 「?」 변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 밑의 「왜만왜정」의 「만왜」는 원비문이 아님을 확인할수 있었다. 그리고 8행「방지왜적퇴」의 「왜」자도 확인되지 않았고 제3면2행 「왜부궤침입대방계」의 「대」자와「방」자도 명확치 않았다.
이외에도 몇몇자에 의문부를 붙이지 않을 수 없었고 중요하게는 제1, 제2면면도 석회가 광범위하게 남아 있었다.
1963년에 조사한 박시형, 그리고 왕건군이 석회는 수개소 확인될 뿐이라고 했으나 그 판단은 전적으로 잘못이었다. 필자는 이 사실을 동행한 일본학자들과 같이 확인함으로써 과학적인 조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시킬수 있었다.
집안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으며 육체적으로도 고행이 동반됐으나 필자는 2일간의 비면조사만으로도 크게 만족하였다. 과학적인 공동조사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글·사진 이진희<일본 명치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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