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 유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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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해운가, 해장, 해상왕은 우리 역사책에 소개된 장보고의 면모다. 반도 변방에 횡행하던 당나라 해적을 물리친 해장임엔 틀림없지만, 이것은 「한 면모」에 지나지 않는다.
옛 문헌이나 사료들을 보면 장보고는 무역가이자 외교관이며 호상이기도 했다.
그런 장보고가 해상무역의 전초기지로 삼아 청해진을 폈던 전남완도의 장도에서 요즘 그 유적이 발견되었다. 국사편찬위 연구원과 사학자 10여명이 참가한 학술 발굴로 미루어 주목할 만하다.
장보고의 가계나 출생지, 출생일을 알려주는 사료는 없지만 그의 행적들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뿐 아니라 중국, 일본의 고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신당서』 『속일본후기』 등이 그 귀중한 자료들이다.
『입당구법순례부기』란 책을 보면 일본의 입당 구법증인 자각대사 엔닌(원인)이 당나라에 머무르고 있는 신라인에게 보낸 간곡한 편지가 소개되어 있다. 일본으로 돌아가려는데 『장대사에게 사정을 잘 말씀드려』 선변을 구하자는 내용이다.
장대사라면 바로 장보고를 두고하는 말이다.
이쯤 되면 그 시절 장보고의 위명을 알 수 있다.
30여년전만 해도 우리 유학생이 미국에 갈 때면 일본으로 가, 거기서 비행기를 갈아 타야 했다. 장보고 시절은 바로 그 반대였다.
필경 소년시절 남해의 섬에서 자란 그는 광대무변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대륙 진출의 꿈을 키웠던 모양이다. 일찌기 중국 서주 지방으로 건너가 승마술도 익히고 창법도 배웠다.
이때 장보고는 신라인들이 당나라 해적들에게 붙잡혀 중국의 노예로 팔려 오는 비참한 광경들을 보았다.
828년 그는 당나라 군적 「무여군소장」직을 내던지고 신나로 돌아왔다. 이때 당나라의 신라방이 있던 적산패의 법화원 사지로부터 소개장을 받아 흥덕왕을 배알할 수 있었다.
이것이 변민(민병)들을 규합해 반사병조직을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대사」라는 타이틀은 제도상의 궁직명은 아니고 「대호상」에게 주는 호칭이었다. 드디어 남해 황해의 당나라 해적을 잠재운 장대사는 중국, 일본과 무역로를 틀 수 있었다.
일본에는 회역사라는 무역사절을 보내고, 중국에는 견당매물사의 인솔아래 교관선을 파견했다. 당나라의 고급상품들을 사들이고 신라의 금속공예품들을 내다 파는 교역이었을 것 같다. 가히 「무역 한국」의 선구자였다.
오늘 그의 유적은 고사하고 변변한 동상 하나 없는 것은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수출입국」을 외치며 일찌기 그 뜻을 편 선현은 못본체 하는 심사가 부끄럽다. 그나마 견적 발굴 소식은 역사 속에 잠자던 무관심을 새삼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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