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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 악몽’에 인터넷서 사라진 시진핑 찬양무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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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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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 시기 마오쩌둥의 혁명문예 노선을 따라 승리 전진하자는 내용의 마오쩌둥 선전화. [사진 바이두]

이달 초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56인조 걸그룹의 공연이 50년 전 문화대혁명(문혁)의 아픈 기억을 되살리며 중국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판 모란봉악단‘56둬화’공연
마오쩌둥 이어 시 주석 영상 나와
50년 전 우상화 연상 비판 일자
당국 “관여한 적 없다” 영상 삭제

56송이 꽃이란 뜻의 10대 소녀 악단 ‘56둬화(56朶花)’는 지난 2일 중국의 국회의사당 격인 인민대회당에서 문혁 시기의 1인 우상화 공연을 연상시키는 내용으로 가득한 대형 공연을 열었다. 공연 포스터에는 중국 공산당 중앙선전부 산하기구인 ‘사회주의 핵심가치관 교육판공실’이 주관한 것으로 명시됐다.

하지만 6000여 명이 공연을 관람한 직후 문혁의 재연이란 비판이 확산되자 당국은 관여 사실을 부인하는 성명을 내고 공연 사진 등 일체의 관련 내용을 인터넷에서 삭제했다.

본지가 입수한 공연허가서 사본과 사진 등 관련 자료에 따르면 56명의 단원은 무대에서 30곡의 노래를 율동과 함께 불렀다.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도 없다’를 비롯, 공산 혁명을 찬양하는 ‘훙거(紅歌)’ 위주였다.

공연은 문혁을 연상시키는 내용이 많았다. 소녀들의 집단 무용은 문혁 당시 유행했던 소녀 군무 ‘붉은 낭자군’ ‘홍등기(紅燈記)’의 동작과 비슷하게 보였다. 특히 ‘조타수에 의지해 큰 바다를 항해한다’는 문혁 시기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에 대한 1인 숭배를 담은 곡으로 지금은 금기시돼 있다.

공연 도중 무대 정면의 대형 스크린에는 사방으로 광채를 내뿜는 마오의 대형 초상화 등이 계속 비쳤다. 또 ‘전 세계 인민이 단결해 미국 침략자와 주구들을 타도하자’는 문혁 시대의 구호와 포스터도 등장했다.

마오뿐 아니라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사진도 대형 화면에 흘러나왔다. 지난해 9월 3일 천안문 열병식을 주재하는 장면과 공산당 간부들과 대화하는 장면 등이었다. 마오 이후의 지도자로 시 주석을 부각시키려는 연출 의도가 역력했다. 또 ‘당신을 무슨 호칭으로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요’나 ‘만두 가게’ 등 시 주석을 찬양하는 내용의 노래도 공연 레퍼토리에 포함됐다. 또 ‘희망의 벌판에서’라 이름 붙여진 공연 제목은 인민해방군 소속 가수였던 시 주석의 부인 펑리위안(彭麗媛)의 초기 히트곡에서 따온 것으로 이 노래도 마지막 부분에 불려졌다.

‘둬화56’은 지난해 창단 때부터 사회주의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왔다. 악단 관계자는 지난 4월 공연 홍보 기자회견에서 “북한에 모란봉악단이 있다면 중국에는 56둬화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공연 소식이 악단 홈페이지 등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자 네티즌 사이에선 거센 비판이 일었다. “시대착오적인 공연으로 문혁의 망령을 되살리느냐”는 내용 위주였다. 급기야 중국 혁명 원로인 마원루이(馬文瑞)의 딸이 공산당 중앙판공청에 공연을 비판하는 내용의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공연을 승인한 당국은 “공연 기획사 측이 공산당 선전부 산하기관이 공연을 주관한다고 해 인가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연이 열리게 된 정확한 내막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공연 기획자인 천량(陳亮)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공연 전에 곡목과 내용을 당국에 사전 제출해 승인받았다. 중앙선전부 산하기구의 관여 여부에 대해서는 당국이 현재 조사 중이라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고 말했다.

중국 내 관측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선전부가 과잉 충성으로 이런 공연을 마련했다는 설과 ▶시 주석을 궁지에 몰기 위해 함정을 팠다는 음모론이다. 한 중국 언론인은 “경위가 어찌 됐건 이 일로 중국 공산당의 핵심 조직인 중앙선전부에 일대 찬바람이 불 가능성이 높아졌다. 50년 전 문혁의 시발이 된 것도 황제에 직언을 했다가 파면된 명나라 관리를 소재로 한 ‘해서파관(海瑞罷官)’이란 이름의 연극이었다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고 말했다.

베이징=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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