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그로부터20년>(1)국교정상화가 무엇을 가져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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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가깝고도 먼 이웃」-한국과 일본이 국교정상화협정을 체결한지 오는 22일로 만20년이 된다.한일양국이 그동안 상호협력-공존의 발전적관계를 모색하기위해 노력해온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20년 세월이 가져야할 성년다운 모습을 찾기에는 아쉬움이 남아있다. 국교정상화를 이끈 어제와 오늘의 주역, 정치·경제·사회·문화면에서의 영향, 서로에 대한 양국민의 의식변화동을 주제로 한일국교성년특집을 마련한다.
북아현동산자락 양지바른 7백평 터에 자리잡은 2백평규모의낡은 2층양옥집 1층거실 구석구석에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세계적 인물들이 자필서명한 사진들이 수십개나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린든·존슨」 미대통령, 장개석자유중국총통, 「바오로」 교황, 「파이갈」 사우디아라비아국왕, 「팔레비」 이란국왕, 일본의 「사또」 (좌등영작) 수상및 「시이나」 (추명열삼낭) 외상, 박정희대통령등등.모두가 이미 고인들이었다.
그 많은 사진 가운데도 거실복판의 기둥받침대에 놓인 한장의 사진은 이집주인의 평생 최고의 순간을 의미함과 더불어 한국현대사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역사의 현장이었다.
『1965년6월22일 일본동경에서 가졌던 한일기본조약조인식 광경이지오.』
해방된지 20년만에, 교섭을 시작한지 만13년8개월만에 한일관계정상화를 타결시킨 사령탑 이동원전외무장관 (59)은 감회가 새롭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당시 39세의 청년장관이 67세의 노정객 「시이나」 일본외상을 상대로 한일국교정상화교섭을 하면서 뿌린 화제나 기행은 한일양국에 모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특히 국내에서는 「제2의 이완용」 이라는 세찬 비난을 한몸에 받아야 했다.
-오는 22일로 한일국교정상화 20주년이 되는데 당시 매국노라는 격렬한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성사시킨 근본동기는 무엇입니까.
『근린국가끼리는 잘하면 형제처럼 화목하지만 잘못하면 원수처럼 되는게 상례아닙니까.
종전이후 미국이라는 선주밑에 자유세계라는 같은 배를탄 한일양국이 새 민주국가로 발돋움하면서 선린관계를 맺어 과거 일방적으로 당하기만한 원수같던 관계를 청산해야만 한다는것이 근본전제였습니다.
또 현실적으로도 우리가 근대국가로 발돋움해야하는데 일본의협조가 필수여건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그에는 참으로 남다른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근14년간 7차례의 회담 끝에 그때 결국 성사시킬수 있었단 요인은 무엇이었다고 보십니까.
『역사적여건이 마련되었기 때문이지요.몹시 어렵고 뜨거웠던 협상이었으나 한일양측은 물론, 미국까지도 그 당위성에 인식을 갔이했지요. 그런차에 누군가가 이룩해야된다는 소명의식에서 우리측에서 박대통령, 금동조 주일대사(후일 외무장관역임)와 내가, 일본측에서 「시이나」외상 같은 분이나타난 것이지요.
65년2월중순 「시이나」외상이 한일기본조약가조인을 위해 방한했으나 한국의 한반도관할권 문제로벽에 부닥쳐 협상이 완전 결렬됐을때 나는 「시이나」외상에게 말했지요. 「누군가 희생물이 돼야하는데 앞날이 구만리같은 30대의 내가 한일양국의 장래를 위해 청춘을 희생시킬 각오로 임하고 있다. 당신은 고희에 가까운, 살만큼 산 입장에서 양국장래를 위해 십자가를 메려는 나를 도와주어도 여한이 없을게 아니냐」고.
「시이나」외상도 이런 내 태도에 상당히 흔들리는 표정이 역연했고 결국 타협점을 찾았지요.』
-당시 평화선을 팔아먹었다, 독도를 몇푼의 청구권에 넘겨줬다는등 결사적 반대속에 성사시킨 관계정상화가 벌써 20년이 됐는데 결과적으로 어떻게 평가합니까.
『잘 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읍니다.그때 안했다면 국가발전이 그만큼 늦어졌을 것이지요.
나는 한일정상화, 월남파병, 중동진출이 우리나라를 이만큼 발전시킨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지나놓고보면 그 결과가 부정적인 면도 없지않았다는게 일반론이 아닙니까.
『관계정상화가 되면 우호관계가 단시일안에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직도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게 부정적이라면 부정적이지요.
상호편견과 오해,우월감, 열등감이 뒤범벅이 되어 양국국민간 마음의 정상화에는 거리가 멀다는데 아쉬움이 큽니다』
-얘기를 좀 뒤로 돌려 외무장관에 발탁된 경위는...
『민정이양전후 2년간 비서실장으로 박대통령을 모셨는데 그분은 뭔가 국가에 보탬이 되려고 좋지않은 줄 알면서 쿠데타를 해놓고보니 너무 국가재원이 없어 뭘로 업적을 남길지 모르겠다고노심초사했어요.그래서 국제정지학도였던 저는 앞으로 외교를 잘하면 자본도, 기술도,국제공신력도 다 얻을수 있다고 강조했지요.이게 그분에게 깊은 인상을주었던것 같아요.
박대통령은 한일회담이 도무지 지지부진하고 국내정정의 혼란만가중시키자 태국대사로 있던 저를 불러들였지요.당시 젊은저를 못미더워했던 공화당측의 거센반대를 극복하고서지요.』
-한일회담에서 가장 어려웠던문제는 무엇이었읍니까.
『대일교섭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어려웠던 것이나 나로서는 가장 모순에 빠졌던 것이 국내의반발이유였유니다.
모교인 연대등을 찾아다니며 반대이유를 물었더니 굴욕적이고 저자세라는 것이었습니다. 지난13년간 왜 우리만 일본에 가서 회담을 하느냐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나는 이번에는 일본측에서 오도록 해야겠다, 내가 먼저 가지는 않겠다고 방침을 정하고 「시이나」외상을 방한토록 했더니 미국측에서도 특사를 보내 회담 안하려고 그러느냐고 했고 또 공화당중진들은 내가 겁장이라서 일본에 안간다고 조롱하고들 야단이었어요.
이렇게 한 반년이상 계속 버티는게 가장 어려운 고비였지요. 결국「시이나」외상이 온다니까 또 국민들은 사과와 속죄를 받아야한다고 들고 일어나 일본측의 강력한 반대에 봉착했지만 끝내 관철시켰읍니다. 지금도65년2월 외무성의 끈질긴 반대에도 결단을 내려 방한한 「시이나」외상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는 참 우리입장을 이해하려고 애쓴 드문 일본인이었지요.』
65년3월말 3박4일간 일정으로 방일했다가 꼭 1주일간 비공식으로 더 체류하면서 협상을벌여 분분한 화제를 남겼는데….
『청구권·어업·재일한국인처우문제등을 타결한 이른바 「4·3합의요강」 때문이었지요. 이제 막바지 고비인데 저쪽내부 갈등으로 풀릴조짐이 없어요. 그래서 하루에 1∼2시간 정도만 자고 「시이나」외상과 철야회담을 계속했읍니다. 그랬더니 일본언론과 정가에서는 청년장관이 의전에도 없는 파격외교를 해가며 노장관을녹초가 되도록 만들어 양보를 받아내려 한다고 야유가 대단했지요.』
-당시 흑막의 대명사처럼 규탄받았던 김-「오오히라」(대평) 메모의 실체는 정말 무엇입니까. 『김종비중앙정보부장과 「오오히라」일 외상이청구권문제에 관한 대강의합의를 한것으로 쌍방의 타협점을 연필로 끼적여 놓은 메모입니다. 몇개의 액수에는 북북 그은흔적도 있고요.
당시 세간에서는 이 메모에 독도양보설이 있다는등 갖가지 유언비어가 난무해 정치공격목표가됐으나 사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지요. 하도 의혹의 눈초리와 비판이 심해 나는 생각다못해 외교관례를 무시한채 김준연선생등 야당의원 3명에게 공개하기까지 했지요.』
-한일관계정상화의 주역으로서 한일양국에 다같이 바라고싶은 것이 있으실텐데….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정말로 존경할수있는 우호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대등한 관계가 돼야합니다.
일본은 미국이 종전후 페허에있던 서구국가를 지방과 적국을 가리지않고 「마셜플랜」을 세워 원조한결과 미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높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때문에 미국과 서구가 한마음이되어 우호와 안보를 확보한게 아닙니까.
일본은 미국이 바다에서, 한국이대륙에서 각각 일본을 막아줬기때문에 공짜안보로 오늘의 경제대국을 이루지 않았읍니까.
일본은 근린궁핍화정책을 버리고 한국을 그들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상호안보와 발전에 이득이 된다는 철학적 자세를 정립해야 할것입니다.』
하는일이 없다는데도 그를찾는 전화는 인터뷰중에도 끊이지않았다. 정치피규제기간중 칩거하며 손을댄 수채화 솜씨가 상당한 수준에 달한듯 작품이 벽에 걸려있었다. 만암이란 아호가 씌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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