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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50주년 교훈…개인 숭배가 낳은 권력 남용 막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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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유상철 기자 중앙일보 중국연구소장 · 차이나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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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철 논설위원

살다 보면 잊고픈 기억이 있게 마련이다. 국가도 그렇다.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부끄러운 역사가 있다. 중국의 경우 ‘10년 대동란(十年浩劫)’으로 불리는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 그런 예다. 16일은 문혁 발생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현재 중국에선 문혁의 긍정적 측면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주장과 더 철저한 반성이 요구된다는 목소리가 충돌하고 있다. 문혁은 오늘의 중국에 뭔가. 또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동네마다 따로 널찍한 식당이 있으며 식당엔 30가구씩 배정돼 이곳에서 공동으로 식사를 한다’. 영국인 토머스 모어가 500년 전 펴낸 『유토피아』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사유재산 없이 누구나 평등한 사회에서 마을 주민이 함께 밥을 먹는 장면을 그렸다. 상상 속 이상 사회인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할 법한 일이 그러나 중국에선 현실이 됐다.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서다. 1958년 농촌에 건설된 인민공사(人民公社) 안에서 중국인은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소비한다는 구호 아래 밥 먹는 것 또한 공공식당에서 공동으로 해결했다.

하지만 이는 ‘먹는 걸 하늘로 삼는 백성(民以食爲天)’의 천성에 맞을 리 없다. 특히 개인의 농지와 가축을 인민공사의 소유로 귀속시키니 농민은 그만 의욕을 잃고 말았다. 농업 생산이 급격히 떨어진 가운데 59년부터는 3년 연속 홍수와 한발이 덮쳐 4500만 명 가까이가 굶어 죽었다. 참극이 발생하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 62년 류사오치(劉少奇) 국가주석은 “천재(天災)가 3할이면 인재(人災)는 7할”이라며 당내 1인자 마오에게 화살을 돌렸다. 마오는 자아비판을 하는 망신을 당했다. 권력도 1선에서 2선으로 밀렸다. 한데 류가 깨닫지 못한 게 있었다. 황제에겐 죽음 외엔 은퇴란 없다는 사실이다. 당시 마오는 건국 이후 계속된 우상화 정책으로 인해 이미 ‘당의 황제(黨皇帝)’가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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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역사상의 전례(典例)에 빗대어 현실 정치를 은유적으로 비판하는 영사문화(影寫文化)의 전통이 깊다”고 전인갑 서강대 교수는 말한다. 그래서인가. 65년 11월 상하이(上海)에서 발행되는 문회보(文匯報)에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는 글이 실렸다. 명(明)대 충신 해서가 황제에게 간언했다가 파면당한 이야기를 마오는 류에 대한 반격의 실마리로 삼았다. 마오는 59년 여산(廬山)회의 때 사신(私信)을 보내 대약진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한 펑더화이(彭德懷)가 ‘해서’라면 자신은 ‘나쁜 황제’냐고 따졌다. 마오는 펑을 류사오치의 배후로 봤다고 한다. 배후부터 치는 건 중국의 오랜 투쟁 전술이다.

마오는 권력 회복을 위한 싸움의 꼬투리를 역사극이란 문화 부문에서 잡았다. 그러면서 문화계에 뿌리내린 반(反)사회주의적인 독초(毒草)을 뽑아내자고 목청을 높였다. 66년 5월 16일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마침내 문혁의 이론과 노선, 방침을 확정한 ‘5·16 통지’가 발표됐다. 문혁의 시작이다. 이후 마오가 사망할 때까지 ‘광란의 10년 문혁 세월’이 이어졌다.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펑더화이는 두 달간 100여 차례가 넘는 비판 투쟁에 끌려 나가 얻어맞은 끝에 반신불수가 됐지만 진통제 주사 한 번 맞지 못하고 사망했으며, 류사오치는 국가주석의 신분임에도 거듭된 구타로 치아가 7개만 남은 채 숨을 거뒀다.

그러나 이런 폭력보다 중국인에게 더 큰 상처를 안긴 건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고 학생이 스승을 때리는 등 인간성의 상실에 있었다. ‘류사오치의 추악한 영혼을 보라’는 대자보를 붙인 건 류의 딸이었다. 중국의 문학가 바진(巴金)이 “자신의 추악함을 직시할 수 없는 민족에겐 희망이 없다”는 말을 하게 된 배경이다. 자본주의 회복을 꾀하는 주자파(走資派)로 몰린 관료와 자산계급으로 분류된 지식인 등 150만 명이 박해를 받아 한을 품고 죽었고, 공묘(孔廟) 등 전통 문물이 파괴됐으며 국가경제는 거덜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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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그런 문혁이 시작된 지 50년이 되는 해이자 문혁이 끝난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혁의 그림자는 아직도 중국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특히 인터넷을 무대로 문혁 재평가파와 반성파 간의 논쟁이 뜨겁다.

중국의 일부 좌파 인사들은 문혁이 반관료주의, 반부패의 긍정적 가치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 문혁 기간 수소폭탄 개발 등 여러 성과가 있었는데 이런 긍정적 측면이 고의로 은폐돼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보다는 문혁에 대한 반성이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더 크다. 이들은 문혁의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으며 문혁과 같은 참극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홍색(紅色) 가요 부르기를 강요하며 공포정치를 펼친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重慶)시 당 서기의 행보에서 문혁의 잔상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목할 건 재평가를 주장하는 쪽이나 반성파 모두 비난의 화살을 국가로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 당국이 여론을 떠보는 리트머스지로 자주 활용하는 환구시보(環球時報)가 등장하는 게 이 무렵이다. 문혁은 워낙 민감 사안이라 중국 내에선 논의 자체가 터부시된다. 일반 매체는 문혁의 회고담 정도를 싣는 데 그친다. 하나 환구시보는 지난해 말부터 이제까지 세 차례나 사설을 게재하며 문혁에 대한 중국 여론을 유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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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시보의 메시지는 일관된다. 문혁에 대한 평가와 반성은 덩샤오핑(鄧小平)이 주도해 개최한 81년의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에 의해 다 끝났으니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는 것이다. 당시 내려진 결론은 문혁은 ‘영도자의 잘못으로 당과 국가, 인민에게 엄중한 재난을 가져온 내란’이란 것이었다. 장칭(江靑) 등 4인방(四人幇)을 처벌하고 박해당한 이들의 명예를 회복했으며 특히 개혁·개방을 추진해 ‘주자파를 타도하자’던 문혁의 주장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국가 건설의 길을 걸음으로써 문혁을 완전하게 청산했다는 것이다. 지금 문혁을 끄집어내는 건 현 정부에 대한 일부 인민의 불만을 선동하려는 정치적 책략이란 주장이다.

중국 여론이 환구시보의 사설대로 움직일지는 미지수다. 현재 중요한 건 ‘옛일은 잊지 않고 훗날의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前事不忘 後事之師)’는 말처럼 문혁의 교훈을 되새기는 일일 것이다. 환구시보는 문혁의 교훈으로 ‘사회문제는 인내심을 갖고 풀어야지 극렬한 정치운동을 통해 풀면 안 된다’는 점을 꼽는다. ‘분노를 터뜨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란 이야기다.

딩쉐량(丁學良) 홍콩과기대 교수는 문혁이란 비극을 통해 중국은 다섯 가지 감사해야 할 교훈을 얻었다고 말한다. “우선 윤리도덕을 포함한 전통문화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를 공개 비판하는 사회는 더 이상 인간 세계가 아니다. 두 번째는 자본주의 제거는 경제 자살이란 점이다. 세 번째는 상호 비난과 투쟁은 정치적 집단 자살이다. 네 번째는 중국은 세계 문명의 주류와 떨어져 살 수 없으며, 끝으로 지도자의 권력이 무제한으로 쓰여선 안 된다는 점이다”.

마오쩌둥을 도와 문혁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던 왕리(王力) 또한 문혁이 남긴 최대 교훈으로 ‘권력의 남용’을 꼽았다. 그런 까닭인가. 집권 이후 계속해서 ‘1인 권력’을 다져가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행보가 문혁 50주년을 맞은 최근 조정에 들어간 모양새다. 중국 공산당 선전부가 얼마 전 중국 언론에 “시진핑 관련 보도를 할 때 ‘시다다(習大大·시진핑 삼촌 정도의 애칭)’란 표현을 금지한다”는 지시를 내렸다고 홍콩 언론은 전한다. 시진핑에 대한 개인 숭배 분위기를 자제시키기 위한 조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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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시진핑 자신이 최근 “설령 지식인의 의견이 정확하지 않더라도 꼬투리를 잡거나 몽둥이질을 하거나 딱지를 붙여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내려 지식인의 반대 목소리를 포용하라는 주문을 했다. 누명을 씌워 몽둥이 세례를 퍼붓는 건 문혁 때 ‘마오를 지키는 붉은 병사’란 뜻의 홍위병(紅衛兵)들이 관료와 지식인을 모욕하고 박해하기 위해 ‘고깔을 씌운 채 조리돌림’한 대표적 악행이다.

시진핑의 중국은 문혁이 조명을 받는 걸 반기지 않는다. 마오의 잘못이 부각되면 자연히 당의 위상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과거의 상처보다는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싶어 한다. 따라서 문혁 50년을 기리는 행사를 중국에선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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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문혁이 우리에겐 어떤 의미가 있나. 진념 전 경제부총리는 마오쩌둥을 한국 경제발전의 공신으로 꼽는다고 한다. “마오가 문혁으로 중국의 개혁개방을 늦추지 않았으면 우리는 경제성장의 기회를 잡기 어려웠을 것”이란 뜻에서다. 한국전쟁의 특수 효과를 일본이 누렸다면 중국 문혁의 지체(遲滯) 효과를 한국이 챙긴 측면이 있다는 이야기다.

‘타산지석(他山之石) 가이공옥(可以攻玉)’이란 말이 있다. 남의 산에 나는 거친 숫돌이라도 내 옥을 다듬는 데는 도움이 된다. 문혁의 비극은 개인 숭배가 부른 화(禍)에 다름 아니다. 제왕적 대통령, 제왕적 총수 등과 같은 말이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야 할 이유다.

유상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