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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와 타로카드의 같은 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77호 34면

택시 taxi


우리말 어원사전 영업용 승용차를 ‘택시’라고 부른 것은 일제 강점기였던 1919년 우리나라 최초의 택시회사인 경성택시회사가 설립되면서부터다. 당시의 요금은 매우 비싼 편이어서 일부 부유층이나 특수 직업을 가진 사람이 탔다.


그 여자의 사전 겉으로만 봐선 모른다. 잘 고르고 싶지만 운에 맡겨야 한다. 좁은 공간에 흔히 남자와 같이 있게 된다. 대화가 중요하지만 절제도 필요하다. 안 그러면 싸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못산다는 점에서 심지어 연애나 결혼과도 공통점이 있다고 가끔씩 생각하는 그것.


오늘도 그 여자는 택시를 탄다. 아침엔 지각대장, 밤에는 잦은 회식으로 피곤하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는 첫 번째 알뜰생활 지침은 택시비를 줄이는 것이라던데. 하지만 사실 오늘날의 대한민국 택시요금 수준으로 초조함과 피곤함을 보상받는, 투자 대비 효용이 높은 일도 없다는 그 여자의 신념은 늘 아침저녁으로 길거리에 서서 허공에 손을 휘휘 젓게 만든다.


문제는 몸소 타보기 전에는 택시의 겉만 보고서는 도무지 그 속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복불복’이라는 말이 이처럼 어울리는 공간도 없다. 호텔도 옷도 식당의 메뉴 하나도, 더 좋은 것을 선택하려면 더 높은 가격을 치르면 정직한 ‘돈값’을 돌려받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택시는 늘 같은 거리에 비슷한 요금을 내면서도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무조건 운에 맡겨야 한다.


그러니 그 여자에게 아침 택시란 타로카드나 고스톱 점 대신일 수 있다. 앉자 마자 “어디로 모실까요?”라고 먼저 물어봐주시고 향긋한 방향제가 뿌려진 택시를 만나는 날은 ‘동쪽 어디에선가 귀인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설렘이 일렁인다. 여자가 타든 말든 시선은 전방 고정, 입은 꾹, 내릴 때는 뒤로 손바닥만 까딱 펴는 기사님, 혹은 차에 밴 담배 냄새를 없애려 여자가 내린 창문을 날씨가 춥다며 다시 올리는 친절함까지 겸비한 분을 만나면 당황스럽다.


가장 운이 없는 날은 여당·야당·집회·시위·여자 운전자 이런 키워드가 등장할 때다. 택시 애용자로서 기사님들이 집회 참가자들이나 운전에 서툰 중년 여성들을 “지겨워”하거나“팔자 좋은 여편네”로 미워할 수도 있다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주제 특히 정치인이 실명으로 등장한다면 악몽을 각오해야 한다. “뭘 몰라서 그런다. 속고 있는 거다”며 본인 의견을 강요하는 기사님에 참다 못해 폭발하려는 순간, 마침 회사에 도착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여자는 아래 위도 없이 덤벼드는 무례한 승객이 될 뻔했다.


그런데, 택시로 운세를 점친다는 건 죄송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너무 신뢰도가 낮아 얄팍하다. 행운과 불운은 겪고 나서 보면 뒤섞여 있는 것 아닌가. 어느 날 밤의 택시처럼 말이다.


그날 밤 택시엔 기분 좋은 향기가 느껴졌다. 심지어 스피커에서는 유명 뮤지컬 주제곡이 흐른다. 오늘은 투플러스 A급 행운의 날이다! 여자는 오늘 택시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친절함과 배려심을 보여주리라 마음먹는다. 먼저 말을 건다. “어머 저도 이 노래 좋아하는데요”로 시작된 대화는 즐거웠다. 과거엔 대기업 중역이셨고 아들이 본인 반대를 무릅쓰고 유학 가서 고생하더니 뮤지컬 배우가 되어 바로 이 노래를 부르는 주인공이 됐다는 기사님의 뿌듯한 인생 이야기가 펼쳐졌다. “세상에, 이게 아드님의 노래에요? 저도 뮤지컬 배우가 꿈이었는데요. 부모님이 반대만 안 하셨어도….”


그러나 기사님과 그 여자는 정작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운전과 귀가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88도로를 달리던 택시가 기사님의 인생 후반부 이야기로 접어들면서 점점 속도가 내려가더니 급기야 길 한쪽에 멈추는 것이었다. “그렇지 정말 장하지? 이제는 돈도 얼마나 잘 번다고. 우리 아들 사진 보여줄게. 이것 좀 봐요, 참 잘 생겼지?” 아, 집엔 언제 간단 말인가. 밤은 이미 깊어 새벽으로 가고 있는데. 그러니 결코 택시 안의 대화에 답변하는 횟수나 몰입도로 자신의 친절함과 배려심을 과시하려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그날의 교훈이었다. 모든 일엔 중용이 필요하고 그건 택시 안의 대화에서 더 절실하다. ●


이윤정 ?칼럼니스트. 사소하고 소심한 잡념에 시달리며 중년의 나이에도 영원히 철들지 않을 것 같아 고민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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