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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으로] 외국인 49개국서 1000여 명 참가 … 가이드 모자라 김일성대 졸업생 긴급 투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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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재미동포 에드워드 리는 지난 7일 중국 베이징발 평양행 여객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기내식으로 제공된 햄버거를 먹고 책을 읽었지만 그의 마음은 다소 들떠 있었다. 10일 북한에서 열린 평양국제마라톤대회의 참가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리의 이번 여행은 겉으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범했지만 그가 탄 비행기가 북한 국적기인 고려항공 소속이라는 점은 그에게 다소의 긴장감마저 줬다고 한다.

재미교포 에드워드 리, 평양마라톤 참관기

에드워드 리는 대구에서 태어나 미국 로스앤젤레스(LA)로 이민을 가 시민권을 획득했다. 미국 국적자인 그가 마라톤대회 참가를 계기로 본 북한의 최근 모습을 e메일을 통해 전해왔다. 본인의 얼굴은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대회 참가 동기에 대해 “원래 로마마라톤대회에 출전하려 했다가 우연히 같은 시기에 평양마라톤 개최 소식을 접하고 계획을 바꿨다”며 “한국인으로 태어나 미국 시민권을 받은 뒤 북한에 간다는 게 감회가 새로웠다”고 밝혔다.

평양 순안국제공항에 도착한 뒤 에드워드 리는 출입국 심사에서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 기내에서 읽은 한국 전직 대통령의 자서전 반입을 북한 측이 막았던 것이다. 미리 ▶남측 서적 ▶성경 ▶남북 관계를 다룬 책 등은 반입 금지라고 안내를 받았지만 깜박했던 탓이다. 더 놀라운 건 북한 측의 반응이었다고 한다. 책을 압수하면서 질책 대신 미안해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북한 출입국 관리소 직원들이 ‘이거 원래 금지된 것이어서 몰수하는 것인데 일단 저희가 보관하고 있다가 돌려드릴 테니 떠나실 때 잊지 말고 꼭 받아 가세요’라고 했다”며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는데 상당히 의외였다”고 말했다.

북한 주민들에 대해선 순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북한 사람들은 재미있게 말하면 산골 촌사람들 같았다”며 “대회 당일엔 주민들이 거리로 나와 박수를 치며 선수들보다 더 즐거워했다.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사람들로 가득한 만원 지하철도 탑승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구형과 신형 전동차를 한 번씩 탔는데 구형에만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 사진이 붙어 있었다”며 “서울 지하철에선 다들 뛰는데 북한에선 빨리 걷는 사람조차 없어 신기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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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리가 지난 10일 평양국제마라톤에 참가해 촬영한 사진들.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출발하는 선수들. [사진 에드워드 리]

평양국제마라톤대회는 김일성 주석의 생일인 4월 15일을 앞두고 북한이 매년 여는 행사다. 2014년부턴 외화 획득과 체제 선전 등을 위해 외국인 참가를 허용했다. 2014년엔 200명에 불과했던 외국인 참가자가 지난해엔 650명, 올해는 1000명 이상으로 늘었다. 참가자들의 국적도 미국·캐나다 등 북미권에서 일본·중국 등 아시아, 유럽·아프리카 등 49개국으로 다양해졌다. 에드워드 리는 “외국인 참가자 대부분이 ‘가지 말라고 하는 곳이라고 하니 더 가고 싶었다’며 참가 이유를 밝혔다”고 전했다. 올해는 공사 중인 김일성경기장 대신 능라도 5·1경기장이 출발점이었다. 경기장엔 조선송이무역총회사·삼천리광학합작회사 등의 스폰서들의 광고판도 눈에 띄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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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리가 지난 10일 평양국제마라톤에 참가해 촬영한 사진들. 평양 거리에서 기념촬영 중이던 신혼부부는 망설임 없이 포즈를 취해줬다. [사진 에드워드 리]

외국인 참가자의 급증으로 북한 현지 가이드가 모자라는 사태도 발생했다. 에드워드 리의 그룹을 담당한 안내원 중 한 명은 김일성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사무직으로 근무하다가 긴급 투입됐다. 외국인 참가자들과 북한 측의 실랑이도 벌어졌다고 한다. 숙소인 양각도호텔에서 ‘화면반주’(노래방 시설)를 즐기던 영국인 참가자 2명이 “비용을 내야 하는지 몰랐다”고 지불을 거부하자 북한 직원이 끝까지 버텨 요금의 일부를 받아내는 일도 있었다.

북한 당국은 외국인 참가자들에게 사진 및 동영상을 자유롭게 찍도록 허락했으며, 에드워드 리도 이를 블로그에 연재하고 있다. 에드워드 리는 주평양 러시아 대사관이나 일부 외국 매체가 “평양에 벚꽃이 만발했다”고 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전했다. 그는 이번 여행 경험을 살려 『웨스트 할리우드, 북한에 가다(West Hollywood Goes to North Korea)』라는 제목의 소설도 집필 중이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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