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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다보스포럼’ 키워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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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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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영
제주평화연구원장

세상의 메가 트렌드와 문제점, 그리고 이에 대한 대책을 가장 정확히 파악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필자는 주저 없이 ‘다보스포럼(WEF·세계경제포럼)’에 귀 기울이라고 조언한다. 매년 1월이면 제네바에서 5시간, 취리히에서는 2시간이나 걸리는 스위스 벽촌 다보스에 빌 게이츠, 조지 소로스 같은 세계적 거물 2500여 명이 몰려든다. 세계적 지성들과 머리를 맞댄 채 시대의 흐름을 분석하고 배우기 위해서다.

 다보스포럼의 매년 주제는 예외 없이 요동치는 시대의 정곡을 찌른다. 탄복할 만큼 정확하게 세태를 읽어내는 비밀은 주제 선정 과정에 숨어 있다. 포럼은 세계 각지의 국가별 의제 선정 모임에서 어젠다를 추린 뒤 이를 바탕으로 지역별·글로벌 회의 순으로 진지한 토의를 거쳐 다음해 주제를 최종 결정한다. 세태 변화에 민감한 풀뿌리 단계에서 수많은 문제를 골라낸 뒤 추리고 추리는 까닭에 가장 중요한 메가 트렌드가 선정될 수밖에 없다. 올 1월 포럼 주제는 ‘제4차 산업혁명’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대부분의 현안이 국경 넘어 촘촘하게 연결된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다. 핵안보·기후변화·테러리즘 및 신종 전염병 등 어느 것 하나 개별 국가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없다. 그만큼 국제적 협력이 중요하며, 공생의 해법을 찾는 소통의 창구가 절실하다는 의미다.

 이런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하는 기구가 바로 다보스포럼이다. 때로 다보스포럼은 단순한 회의체를 넘어 외교의 장(場)으로도 활용된다. 실제로 1988년에는 그리스·터키 간 정상회담이, 다음해인 89년에는 사상 첫 남북한 각료급 회의가 이 자리를 빌려 열렸다. 이 덕에 지난해 다보스포럼은 스위스 당국에 의해 국제기구로 공인 받기까지 이르렀다. 스위스의 작은 도시에서 출범한 이 포럼이 이제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세계인의 국제기구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런 다보스포럼을 모델로 2001년 중국이 만든 게 하이난섬에서 매년 열리는 ‘보아오포럼’이다. 처음 시작될 때는 ‘짝퉁 다보스’라는 오명을 씻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출범 이래 시진핑(習近平) 주석과 리커창(李克强) 총리가 교대로 참석할 정도로 중국 정부가 전폭 지원하면서 이제는 이론의 여지 없는 ‘아시아의 다보스포럼’으로 컸다.

 이 포럼에서 중국이 얻는 이득은 막대하다. 시진핑 정부는 중국의 변화를 감지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몰려온 오피니언 리더들을 상대로 자신들의 입장과 정책 등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일대일로’ 정책의 구체적 실천 방안이 발표된 곳도 이 포럼이었다. 이와 함께 중국의 변화와 문제점에 대한 세계인의 시각과 진단을 이 채널을 통해 흡수할 수도 있다. 원활한 쌍방향 소통이 이뤄지는 셈이다.

 우리도 정부와 민간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각 분야 의제를 논의하는 국제포럼이 있다. 다음달 25일부터 3일간 제주도에서 열리는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제주포럼’이 그것이다.

 2001년 발족한 후 11회를 맞는 올 제주포럼은 ‘아시아의 새로운 질서와 협력적 리더십’이라는 주제로 60여 개국, 400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참석자들은 북핵 위기에서부터 신기후체제, 전기차 혁명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핵심 화두를 놓고 70여 개 세션에서 깊숙이 논의하게 된다. 올해에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일본 총리, 마하티르 모하맛 전 말레이시아 총리, 고촉통 전 싱가포르 총리, 조 케저 지멘스 회장, JB 스트라우벨 테슬라모터스 공동창업자 등 글로벌 리더들이 대거 참석한다.

 바야흐로 발족 15년에 접어든 제주포럼은 한국의 높아진 위상에 발맞춰 아시아의 대표 포럼으로 육성돼야 한다. 중국이 보아오포럼을 통해 발전 전략과 대외정책을 온 세상에 전파하듯 이 행사 역시 정보와 의견, 그리고 아이디어와 영감의 원천이자 유통망으로 활용돼야 한다. 앞으로 제주포럼이 얼마나 성장할지는 전적으로 우리 의지에 달려 있다. 중국이 그랬듯 당국은 제주포럼의 위상을 드높여 국제적 현안이 폭넓게 논의되는 플랫폼으로 뿌리 내리도록 애써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례적으로 대통령 등 정부 고위 인사가 참석해 힘을 실어주는 게 절실하다.

문태영 제주평화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