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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하위팀 반란 … 레스터시티의 기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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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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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터시티의 공격수 레오나르도 울로아(오른쪽 세번째)가 지난 18일 웨스트햄과의 경기에서 후반 추가시간에 동점골을 터뜨린 뒤 환호하고 있다. 만년 하위팀 레스터시티는 올 시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축구로 ‘하면 된다(Can do)’는 정신을 일깨우고 있다. [레스터 AP=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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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인 여우들(Fantastic Mr. Foxes)’.

창단 후 131년간 최고 성적 2위
남은 3경기 중 1승만 해도 첫 우승

1등 경험 없었던 라니에리 감독
대부분 무명인 주전 선수들에게
“우린 지하실 팀” 승부욕 불지펴

영국의 BBC방송은 최근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구단 레스터시티의 이야기를 영화화 할 경우 이런 제목이 어울린다고 밝혔다. 공격수 제이미 바디(29·잉글랜드) 역할에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42·미국), 클라우디오 라니에리(65·이탈리아) 감독 역에는 로버트 드 니로(73·미국)가 적임자라는 분석도 곁들였다. 영국 일간지 미러에 따르면 실제로 할리우드 제작사가 바디의 인생사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 준비 중이다.

영화 같은 이야기가 현실에서 펼쳐지고 있다. 엠블럼에 여우를 새긴 레스터시티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나 첼시 같은 명문구단과는 거리가 멀었다. 1884년 창단 이후 줄곧 1·2부 리그를 오르내렸다. 1929년에 딱 한 번 1부 리그에서 준우승한 게 131년 팀 역사상 리그 최고 성적이다. 지난 시즌엔 14위로 간신히 1부 리그에 잔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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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65·이탈리아) 30년간 5개국 15프로팀 지휘했지만 1부리그 우승 이력 전무, 수퍼맨·대부로 불려

올 시즌 개막 전 영국 베팅업체 윌리엄 힐은 레스터시티의 우승 배당률을 1대5000(1만원을 걸 경우 5000만원 지급)으로 분석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여전히 살아있을 확률과 비슷하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그런 비아냥을 들었던 레스터시티가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눈앞에 두고 있다. 28일 현재 22승10무3패(승점76)로 단독 선두다. 2위 토트넘과 승점 7점 차. 남은 3경기에서 1승만 추가하면 우승이 확정된다. 92년 출범한 프리미어리그에서 블랙번이 우승한 95년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즌은 맨유, 아스널, 첼시, 맨체스터시티 등 빅클럽 4팀 만이 우승컵을 나눠가졌다. 레스터시티 선수단 연봉 총합(약 765억원)은 첼시(3600억원)의 5분의1 수준이다.

레스터시티는 ‘다국적 외인구단’이다. 라니에리 감독부터 ‘일류’ 타이틀과는 거리가 멀다. 30년간 5개국 15개 프로팀을 지휘했지만 1부리그 우승을 차지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지난해 그리스 대표팀을 이끌다 세계 187위 페로 제도에 패한 뒤 쫓겨나듯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지난해 7월 라니에리가 레스터시티를 맡자 영국 언론들은 “우유부단한 실험가(tinkerman)를 데려왔다”고 비아냥댔다. 하지만 7개월 뒤 영국 더 타임스는 ‘실험가에서 수퍼맨으로(tinkerman to superman)’라는 제목을 통해 섣부른 판단을 사과했다.

88년 이탈리아 칼리아리를 맡아 3부리그에서 1부리그로 승격시킨 라니에리는 무명 선수들을 모아 팀을 재건했다. 그는 선수들에게 “다른팀이 수영장이 딸린 빌라에 산다면 우린 지하실에 살고 있다”고 독려했고, 라커룸에 레스터 출신 록밴드 카사비안의 ‘파이어(fire)’를 틀어주며 선수들의 열정에 불을 지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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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터시티는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대부분 무명 선수로 구성됐다. 공격수 바디는 스무 살이던 2007년 아마추어 7부리그 팀에서 뛰었다. 오전엔 공장에서 의료기구를 만들고, 축구팀에서 주급 30파운드(5만원)를 받았다. 바디는 올 시즌 11경기 연속골을 포함해 득점 3위(22골)에 올라 있고, 잉글랜드 대표팀에 뽑혔다.

알제리 이민 2세 측면 공격수 리야드 마레즈(25·알제리)는 프랑스 빈민가 출신이다. 2013년 9억원의 저렴한 몸값에 레스터시티로 이적한 그는 올 시즌 17골·11도움을 올려 잉글랜드 프로축구선수협회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말리 이민자 출신의 중앙 미드필더 은골로 캉테(25·프랑스)는 작은 키(1m69cm) 탓에 프로팀 입단테스트에서 줄줄이 탈락했다. 2010년 프랑스 볼로냐에 입단한 이후에도 차를 살 돈이 없어 스쿠터를 타고 다녔다. 지난 시즌 프랑스 캉에서 1부 리그를 첫 경험한 캉테는 올 시즌 레스터시티에서 ‘오토바이’로 불린다. 공이 있는 곳에 오토바이처럼 빠른 속도로 달려간다는 의미다. 지난 3월 프랑스 대표팀에 뽑혔다.

| 구단주 나라 태국선 우승 기원 법회
동화같은 얘기에 전 세계 팬 열광

미생(未生)들이 똘똘 뭉친 레스터시티는 볼 점유율이 20팀 중 18위(46%)에 불과하다. 패스 성공률 역시 공동 18위(72%)다. 하지만 탄탄한 수비와 날카로운 역습으로 무실점 승리만 12차례 거뒀다. 라니에리 감독은 지난 25일 스완지시티를 4-0으로 꺾은 뒤 “이제 꿈이 현실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레스터시티의 동화 같은 성공 스토리에 전 세계가 열광하고 있다. BBC는 2월28일 “레스터시티가 경기 종료 직전 결승골을 터뜨리자 홈구장에 모인 3만여 명의 팬들이 환호했고, 500m 떨어진 곳에선 규모 0.3의 인공지진이 관측됐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레스터시티의 ‘하면 된다’는 정신이 다른 스포츠에도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구글에 ‘레스터시티 기적(leicester city miracle)’을 검색하면 약 56만6000개의 결과물이 뜬다. 구단주 비차이 스리바다나프라바(58)의 모국 태국에서는 승려들이 레스터시티의 우승을 기원하는 법회를 열었다. 레스터시티의 일본인 공격수 오카자키 신지(30)는 일본에서 뜨거운 호응을 받고 있다.

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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