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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주먹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75호 4 면

어릴 적 권투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TV 앞은?아버지 자리였습니다. “왜 그리 열심히 보세요?”라는 질문에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링 위에 올라가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오직 혼자서 세상과 싸워야 해. 인생도 저렇단다.”


지난 일요일, 오랜만에 권투 경기를 생중계로 봤습니다. 필리핀의 돌주먹 파퀴아오(38)의 은퇴경기였죠. 세계 복싱 사상 유일하게?8체급을 석권한 이 ‘살아 있는 전설’의 통산?전적은 이날의 승리로 58승(38KO) 2무 6패.?그는 어떻게 그렇게 강한 걸까. 정석대로 얼굴을 완벽하게 가린 브래들리에 비해 그는?가드도 거의 하지 않더군요. 그래도 브래들리는 별로 때리지 못했습니다. 피하는 동작이 너무 빨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브래들리를 자신의 사정거리 안으로 슬금슬금?몰아붙였고 덕분에 다운도 두 차례 빼앗을?수 있었죠. 저게 바로 단돈 2000원을 받고?길거리 복서 생활을 시작하면서 몸에 익힌?삶의 비법이겠구나 싶었습니다. 상대보다 빠를 것, 상대를 내 페이스로 끌어들일 것, 그리고 나만의 한방으로 마무리 지을 것.


뭐, 말은 쉽습니다만, 쉬운 일은 아니지요. 링?위의 삶을 마무리 지은 파퀴아오는 후련한?표정이었습니다. 치바 데츠야의 만화 ‘도전자 허리케인’(원제 ‘내일의 조’)에 나오는 대사 “하얗게 불태웠어”가 잘 어울리는.


p.s. 두툼한 글러브를 끼고 주먹으로만 겨루는 권투가 왠지 순박하게 느껴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정형모 문화에디터 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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