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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현재 가장 주목해야 할 한국영화, 정지우 감독의 영화 '4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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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되라고 때린다는 말, 이제는 넣어 두세요

정지우 감독의 인권영화 ‘4등’ 제작기

박수받는 1등도, 차라리 포기하기 쉬운 꼴등도 아니다. ‘4등’(4월 13일 개봉)은 ‘해피엔드’(1999) ‘은교’(2012)를 연출한 정지우 감독의 새 영화. 메달권에서 매번 아슬아슬하게 밀려나는 초등학생 수영 선수 준호(유재상)의 이야기다. 준호는 만년 4등이다. 수영을 좋아하고 실력도 있지만 기록에는 도통 욕심이 없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준호가 수영이라도 잘해 대학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엄마(이항나)는 애만 탄다. 실력 있다는 수영 코치 광수(박해준)를 새로 채용했는데 알고 보니 이 코치, 준호를 때린다. 정말 맞아서라도 그리고 때려서라도 우리는 1등이 되어야만 하는 걸까. 1등 제일주의 사회에 뿌리내린 체벌과 폭력에 관한 뜨끔한 질문을, 정지우 감독은 ‘4등’에서 속 시원히 파헤친다. 인권영화라 해서 딱딱하고 무거울 거란 오해는 금물이다. 마음이 환해질 만큼 아름다운 수중 촬영 장면들은 이 영화가 선사하는 또 다른 희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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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등` 스틸컷]

수영과 우주 그리고 아이가 자란다는 것. ‘4등’의 질료가 된 모든 것을 선으로 이으면, 그 중심엔 준호가 있다. ‘4등’은 정지우 감독이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스포츠 인권에 관한 영화를 제안받으며 만들게 된 영화지만, 그의 마음속에 준호가 발아한 건 3년여 전 남극에서다. “3주 정도 남극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어요. 거기서 한 식물학자가 그러더군요. 남극의 식물은 1년에 0.1㎜씩 자란다고요. 생장 환경이 열악해서 웬만큼 자라는 데 100년쯤 걸린다는 거예요. 그러나 분명히 살아 있는 거죠. 우리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오랜 후까지. 식물이 살아남으려면 질소와 수분과 빛이 필요한데, 그가 말하길 빛은 우주에서 온다는 거예요. 매일 우주에서 빛이 왔기에 식물이 존재하고, 먹이 연쇄를 통해 인간이 있는 거죠. 평소 우주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 하며 살았는데, 우리 생명이 우주와 어떤 연관을 맺고 있다는 걸 그 순간 남극의 눈밭에서 온몸으로 느꼈어요. 와, 정말 어마어마한 기분이었죠.”

그때의 행복감은 ‘4등’ 속 준호의 한때에 오롯이 투영됐다. 엄마도 광수 코치도 모르게 수영장에 혼자 숨어든 새벽, 아이는 물속에서 마음껏 헤엄친다. 시합용 레인을 표시하는 코스 로프가 다 풀어져 경쟁 따윈 생각하지 않아도 좋은 수영장에서, 어디선가 들이친 한줄기 빛을 쫓으며. 정지우 감독이 “우주에서 유영하는 이미지”를 상상하며 연출한 장면이다. 영화에서 준호는 말한다. “햇살을 쬐면 우주의 기운을 받아서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아요.” 남극에서 단서를 얻었을 뿐, 어쩌면 그는 아이들 아니 우리 모두가 한때 간직했을 동심을 상징하는 가장 보통의 아이다. 그리고 ‘4등’은 그런 아이를 등수 매기는 경쟁 사회에 밀어 넣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것도 좋아했던 무언가를 싫어하게 만드는, 폭력이라는 가장 나쁜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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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등` 스틸컷]

폭력에 대한 새로운 시선
오랜만에 상업영화의 틀을 벗어난 정지우 감독은 “마음껏 만들었다”고 말한다. “상업영화라면 제목이 ‘1등’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신승리’쯤은 되어야 했겠죠. 눈물과 용서로 얼싸안는 감동의 도가니 없이 영화를 끝내는 것도 상업영화라면 용서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번 영화만큼은 정말 자유롭게 만들었습니다.” 엘리트 스포츠를 국가 정책으로 추구하는 피로감 가득한 환경에서 국가대표를 지낸 여러 종목의 체육인을 인터뷰해 시나리오를 써 내려갔다.

어느 한 사람의 실화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 ‘4등’을 여는 의미심장한 흑백의 오프닝 장면도 그렇게 탄생했다. 청소년 시절 수영 국가대표로 아시아선수권 메달을 노리던 어린 광수(정가람)는, 큰 대회를 앞두고 방만한 행동으로 체벌받던 중 울컥해 대표팀을 박차고 나간다. 이제 동네 수영센터 강사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그의 마음속엔 모순된 후회가 가득하다. ‘내가 조금만 더 맞았다면, 이렇게 살지 않을 텐데.’ 그는 그런 마음으로 준호를 때린다. 폭력의 세습. “초반 흑백 장면은 일종의 퀴즈예요. 어린 광수는 맞을 짓을 했나요? 사실 열에 아홉은 했다고 할 수도 있어요. 기성세대, 특히 남학교를 거쳤다면 더더욱 말이죠. 저 역시 학창 시절 이루 말할 수 없게 맞은 기억들이 지금도 선명하니까요. 하지만 경험은 몸에 붙어요. 다른 방법은 배운 적이 없으니까, 폭력이 계속되는 거예요. ‘맞을 짓은 없다’는 전제 하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요. 우리 사회도 그런 고민에 접어들 때가 됐다고 생각해요.”

‘4등’은 ‘때리는 어른이 나쁘고 맞는 아이가 피해자’라는 구도로 폭력을 설명하진 않는다. 정지우 감독은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제일 견디기 힘든 숙제를 던지는 게 바로 자식 같다”는 그의 말대로 “폭력을 이분법적으로 갈라 말하기에 우리 사회는 훨씬 복잡”하다. 광수 코치와 엄마 모두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엄마를 연기한 이항나는 말한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생존에 불안을 느끼는 게 아닐까요. 사회적 지위에 대한 불안, 살아가는 것에 대한 불안. 아이 키우는 엄마 입장에서 ‘주변 학부모들은 왜 이렇게 학원을 보내 애들을 못 살게 굴까’ 생각했는데, 엄마들만의 잘못이 아니란 걸 ‘4등’을 통해 새삼 느꼈어요.” 스포츠계만의 화두가 아니란 얘기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때린다”가 정지우 감독이 말하는 과거의 훈육법이라면, 미래의 방법은 뭘까.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진심 어린 눈빛으로. 어렵고 오래 걸리겠죠. 그런데 그렇게 찾아낸 답은 본인에게 일종의 근육이 생긴 것이기 때문에 평생 자기 걸로 남는 거예요.” 더디지만 스스로 힘껏 단단하게 자라는 남극의 식물처럼 말이다. 맞으면 등수가 빨리 오른다. 하지만 과연 그게 옳은 걸까. ‘4등’에서 이것은 어른들만의 고민이 아니다. 마지막 장면, 준호의 복잡한 눈빛에는 오만 가지 마음이 엇갈린다. 제 인생을 스스로 고민하며, 아이는 그렇게 성큼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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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등` 스틸컷]

물의 감촉까지 살린 수중 촬영
물속에서 행복하고 자유로운 준호의 진심에 관객을 공감시키기 위해 수영 장면의 영상미는 필수였다. 애초 정지우 감독이 수영 종목을 고른 이유가 바로 수중 촬영 때문이었다. 그는 프랑스 작가 바스티엥 비베스의 그래픽 노블 『염소의 맛』(미메시스) 속 서정적인 수영장 이미지에 반해 있었다. 이 작품은 수영장 특유의 염소 냄새, 공간을 울리는 물소리와 숨소리, 물의 감촉과 맛을 감각적으로 활용해 낯선 소녀에게 첫눈에 반한 소년의 마음을 섬세하게 그려 낸다. 정지우 감독은 “오래전부터 물속을 제대로 그려 보고 싶었던 마음”을 ‘4등’에서 공들여 실현했다.

순제작비 6억원의 저예산 영화지만, ‘해무’(2014, 심성보 감독) ‘해적:바다로 간 산적’(2014, 이석훈 감독) ‘노브레싱’(2013, 조용선 감독) 등에 참여한 수중 전문 촬영 업체(씨플렉스)의 도움도 받았다. 수영하는 사람의 시점에서 다양한 앵글을 시도하기 위해, 수영 선수와 아역 배우들이 직접 고프로(GoPro)·5D 등 수중 바디캠 장착 후 일부 장면을 소화했다. 와이드 숏을 위해 깊은 수영장이 필요했던 제작진은 해양 경찰의 도움으로 3~7m 깊이의 여수 해양경비안전교육원 수영장에서 촬영할 수 있었다. 이천장애인체육종합훈련원 수영장부터 김천실내수영장·인천 문학박태환수영장까지 ‘4등’ 촬영팀이 모두 휩쓸고 지나갔다.

수영 대회도 수차례 방문하며 경기 장면을 찍었는데, 실제 선수들과 그 가족이 보조 출연으로 참여했다. 극 중 준호가 부러워하는 1등 선수와 몇몇 촬영에서 유재상의 대역으로 나선 소년들은, 대부분 서울체육중학교에 재학 중인 실제 수영 선수들. 배우들은 현역 수영 코치와 선수를 직접 관찰하고 인터뷰해 연기에 사실감을 부여했다. 정가람의 말처럼 “식단 조절과 운동으로 수영 선수 같은 몸만들기는 기본”이고 박해준과 유재상은 현장에서 촬영 막간 시합까지 펼치며 수영에 익숙해졌다. 유재상은 오디션 당시까지 실제 수영 선수로 활동한 적이 있는 프로급 실력. 수영 장면이 제일 쉬웠던 그에게 가장 힘든 순간은 오히려 깊은 새벽 혼자 물속에서 촬영할 때였다. “처음엔 졸리고 무서웠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누가 옆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신기하게 괜찮아졌어요.” 지금은 다 추억이라는 듯 유재상이 씩 웃었다.

정지우 감독은 말한다. “아이에겐 시간이 필요해요. 좀 쓸쓸하게, 혼자 둬야 하는데 대부분의 부모들이 불안과 이기심에 허우적거리며 아이를 몰아붙이는 것 같아요. 저 역시 그렇고요. 하지만 ‘4등’을 만들면서 조금은 편해졌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내 아이를) 잠시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을 나누고 싶어요.” 아이를 키운다는 건 결국 아이가 스스로 자라기를 기다리는 일이 아닐까. ‘4등’이 가르쳐 준 소중한 진리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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