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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에서 꽃과 과일향이 나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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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호 20면

지난해 여름 교토·고베·나라 일대에 퍼져있는 사케 주조장을 둘러봤다. 술도가인 와이너리를 찾아 음미하는 일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만 하는 줄 알았다. 일본 사케 생산량의 40% 정도를 담당하는 간사이 지역이다. 좋은 쌀과 물 덕분에 옛부터 명주의 고장으로 이름 높다. 100년, 200년 정도의 역사만으론 전통의 술도가 소리를 듣지 못한다. 400년에서 700년 정도는 되어야 명가 축에 낀다. 운이 좋았다. 이들 도가를 일일이 찾아 웬만한 사케 명주는 다 마셔보았으니까. 간사이국제대학의 한국인 교수 이용숙이 아니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이 교수는 사케 소믈리에로 유명한 인물이다.


전통 사케는 술의 깊은 세계를 실감케 했다. 쌀로 만든 술에서 그윽한 과일향이 풍겼다. 투명하고 깔끔하며 입안에 남는 맛의 여운은 길었다. 좋은 와인이 주는 오감충족의 쾌감이 사케에서도 느껴졌다. 명가 사케는 체온과 동화되며 번진다. 혀와 입천장에 스며드는 맛과 향은 다채롭고 풍성한 변주곡 같았다. 기대와 수용 감각이 서로 다투지 않는 조화의 상태는 감탄뿐이다. 쌀에서 어떻게 이런 향과 맛이 날 수 있는지! 감각의 제국이 있다면 사케란 영토는 꽤 넓은 지역을 할당해도 될 듯싶다.


와인은 우러러 보이고 사케는 관심 바깥이란 무지의 판정을 번복한다. 서구 문화의 우월감을 떨치지 못한 편향의 시선을 거두기로 했다. 세상의 가치는 새롭게 발견되어 의미화 될 때 커지지 않던가. 쌀로 술을 빚은 긴 역사는 동양이라고 뒤지지 않는다. 술을 수용하는 문화가 나머지 차이를 벌렸을 뿐이다. 와인만큼 높은 격조의 술이 곁에 있다는 걸 잊고 살았다. 사케는 만드는 이의 노력과 먹는 이의 사랑을 더해왔다. 우리 술 보다 국제적 평판이 더 높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케 체험의 여운은 꽤 오래갔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마셨던 사케 얘기를 떠벌였으니. 생각보다 사케 애호가들이 많았다. 일본인들도 모르는 종류를 줄줄 꿰고 화려한 수사의 품평이 이어진다. 사케 예찬론자들은 하나같이 우리 술의 빈약함을 개탄했다. 똑같은 쌀로 만든 술의 격차는 현실이다. 하지만 기호의 세계에서 상대적 비교란 별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술의 뿌리가 같은 일본과 한국이다. 원료와 제법을 공유하는 우리 술이 품질이 떨어질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케가 외려 우리 술에 대한 관심을 높이게 된 계기로 다가왔다.


낡은 주세법에 묶여 우리 술 고급화 힘들어높아진 한식에 대한 관심 덕분에 어울리는 술을 찾는 이들이 많다. 유명 호텔의 음식 담당자나 품격 높은 먹거리를 만드는 셰프들도 그 가운데 하나다. 수준 높은 음식에 어울리는 우리 술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자리가 어색하지 않을 격조의 함량이 모자라는 탓일 게다.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우리 술의 고급화는 낡은 주세법에 묶여 운신의 폭이 매우 제한된다. 제조자의 의욕 저하는 당연하다. 해결책은 언제나 그렇듯 더디고 난감하기만 하다.


우리 술 막걸리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다. 반짝했다 사라지는 유행이 아닌지 걱정될 정도다. 막걸리가 외면받는다면 이유도 있을 것이다. 단조로운 맛과 세분화된 취향 충족에 모자라는 거칠음 때문이 아닐까. 쌀의 도정률과 전통의 제법을 조화시켜 발전시킨 사케의 고급화는 이미 확인했다. 막걸리 자체를 의심해선 안 된다. 좋은 쌀로 제대로 만들었다면 막걸리의 가능성 또한 마찬가지일 테니.

엄청나게 많고 복잡해 보이는 이 세상의 술이란 네 가지 중 하나다. 재료인 곡물과 과일, 제법인 발효와 증류로 구분된다. 막걸리는 쌀을 발효시켜 만든 술이다. 쌀만 바라보고 살았던 생활사를 대표하는 우리 술의 바탕이라 할 만하다. 쌀과 물, 이를 빚는 사람만 있다면 누구라도 만들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엔 3000개 정도의 막걸리 양조장이 있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막걸리란 술의 가치를 확신하는 애정의 행동만이 우선이다. 진정 좋은 막걸리의 자부심을 품고 사는 일은 국가적 차원에서 봐도 해가 될 리 없다.


음식에 조예 깊은 친구들에게 좋은 우리 술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몇 명의 입에서 동시에 “복순도가 손막걸리”가 튀어나왔다. 복순도가? 처음 들어보는 촌스런 이름이다. 술 빚는 이의 이름 박복순에서 따온 작명이라 했다. 이유야 어떻든 한번 들으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사케의 품격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울산시에 있다는 기대의 술도가를 직접 찾아가 확인해 보기로 했다.


울주군 상북면에 사는 주부 박복순은 음식 솜씨가 좋기로 소문났다. 시골집 살림이야 뭐 다를 게 있을까. 매일 먹는 음식보단 발효음식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동네 대소사에 쓸 술을 빚었다. 술맛에 감탄한 주변 사람들이 본격 생산을 독려해 ‘복순도가’를 세웠다. 예전 방식대로 직접 누룩을 띄웠고 옛 항아리에 넣어 술을 익혔다. 술맛의 비결은 아낌없이 쓰는 누룩과 유기농 쌀의 양이라 했다. 두 공기의 쌀이 한 공기의 막걸리로 바뀌는 양을 정량으로 쳤다. 박복순의 술맛은 곧 쌀의 진수를 농축시킨 넉넉한 인품이었다.


어머니의 술도가는 온 가족이 매달리는 가업으로 커졌다. 소문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늘어난 덕분이다. 여느 막걸리보다 여덟 배 정도 비싼 값은 외려 제대로 만든 막걸리란 신뢰를 더했다. 많이 사려고 해도 소용없다. 만들 수 있는 양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서울의 재벌가 사람들은 직접 찾아와 받아가기도 했다. 유명 호텔 관계자들도 주목했다. 어느 날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복순도가는 세상에 알려졌다. 2012년 핵안보정상회담의 만찬 건배주로 쓰겠다는 주문이었다. 광고도 로비도 할 줄 모르는 시골의 술도가는 영문도 모른 채 당황했다.


돈보다 발효가치 소중히 여겨 투자 제안 거절찾아본 복순도가는 당연히 그 이후의 모습이다. 건축가 아들이 설계한 양조장 겸 사무실은 큰 규모와 멋진 건물로 동네의 명물이 됐다. 복순도가에는 적당히 지저분하고 어수선한 시골동네 술도가의 모습이 없다. 발효건축이라 이름 붙인 깔끔한 건물 내부에서 막걸리가 만들어진다. 채 10개가 되지 않는 커다란 독에 담겨져 술 익는 과정은 누구라도 볼 수 있다. 화학을 전공한 작은 아들이 발효이론으로 합세했다. 어머니의 고집과 경험을 더해 좀 더 균일한 맛을 낼 수 있게 됐다.


갑자기 성장한 음식점이나 가게에 보내는 의혹의 시선은 당연하다. 원래의 마음을 잊어버린 변질된 상혼의 모습이 주는 실망감 때문이다. 나 또한 의혹의 눈길을 접지 못했다.


그러나 안심해도 좋다. 유명세 이후 대규모 투자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유혹을 뿌리친 이는 젊은 아들이었다. 복순도가는 돈이 아닌 발효의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 했다. 발효 독을 열어 보았다. 살아 숨 쉬는 효모 유기체의 ?톡톡?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의 순수함과 고집을 지키고 있는 원칙 안에서만 복순도가가 아름다울 수 있음을 파악했다.


복순도가의 막걸리에선 과일과 꽃 향기가 난다. 자연 탄산의 청량감이 더해진 톡 쏘는 맛은 깔끔하다. 한 모금 넘기면 향의 잔향이 꽤 오랫동안 남는다. 쌀과 누룩이 시간을 머금어 만들어낸 자연발효의 향과 맛이다. 사케에서 받았던 충격이 되살아났다. 같은 쌀과 제법으로 만든 막걸리가 엉망일 수 없다는 확신은 옳았다. 우리에게 좋은 술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 동안 제대로 안 만들었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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