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회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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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우리 해군과 중공 해군이 서해공해상에서 웃는 얼굴로 만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해군함정 8척과 해경정 1척등 우리쪽의 중공 어뢰정 인계선단과 중공측 인수선단 6척의 만남은 비록 높은 파도 위에서 이루어졌지만 만면희색의 모습이었다.
역사상 한·중 두나라 해군의 만남은 거의 1천4백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서기 598년 6월 수의 문제가 고구려 평원왕의 선제공격에 대노하여 30만대군으로 쳐들어 왔다.
산동반도의 동래에서 바닷길로 평양을 직공하려던 주나후의 수군은 풍랑으로 군사를 돌리지 않을수 없었다. 그때 살아 돌아간 자는 10중9. 패전의 원인을 천기에 돌렸으나 고구려 수군의 위세를 짐작할만했다.
더 참담한 수의 패배는 그 후에있었다. 612년 수양제의 2백만대군이 고구려를 침략했을때 내호아의 수군이 평양 60리를 앞두고 왕제 건무가 이끄는 고구려 수군의 기습에 참패한 것이다.
그 패전으로 무기와 군량을 잃은 자문술·우중문의 육군이 평양30리 지점에서 후퇴하지 않을수 없었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당대종의 대군이 고구려를 침략한 645년에도 장량의 당수군은5백여 전선에 4만3천 병력으로 비사성을 함락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안시성의 패전으로 큰 성과를 올릴수 없었다.
한편 백제의 멸망은 수군의 실패로볼수도 있다. 당나라 소정방의 13만대군이 출정한뒤 신라는 태자 법민이 병선 1백여척으로 덕물도(德積島) 앞바다에서 맞아 사비성공격에 나섰으나 백제는 이를 막지 못하고 백강을 사수할수 없었다.
우리 수군이 원의 지배에 따라 일본 원정에 나선 일도 있다.
1274년 고려 충렬왕때 고려 김방경과 원의 홀돈은 9백척의 함선에 4만의 병을 이끌고 대마도를습격한 뒤 북구주의 박다를 공격했으나 폭풍우로 실패했다.
7년뒤 2차원정때도 고려는 1만의 수군과 함선 9백척을 부담했으나 역시 태풍으로 실패했었다.
중국해군이 침략군이 아니라 지원군으로 왔던 것은 정유재난때 명의 도독진린의 수군이 처음이다.
명량대첩으로 이미 제해권을 장악한 이순신의 우리 수군을 도와 임난 최후의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왜군을 물리치는데 힘을 보탰다.
역사의 윤회는 오늘 중공 어뢰정의 인도라는 사건까지 연출했다. 우리를 둘러싼 격동의 파고속에서 우리 해군의 건실한 성장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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