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3)제82화 출판의 길 40년(6)문학서적 출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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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문화적으로 높이 평가될만한 출판기획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독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는다는 보장은 없다. 출판사의 새로운 기획이 독자들의 호흡과 일치하기 힘들다는 것이 출판의 가장 큰 어려움 중의 하나다. 그렇다고 독자들의 구미에만 따라다닌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것이 없으면 독서율은 점점 더 떨어진다. 그래서 모험을 무릅쓰고 출판사들은 항상 새로운 출판물을 기획하고 창출해내는 것이다. 또 이것이 출판이 감당해야할 문화적 사명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정은 30년대에도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1938년 12월 『조광』지에 실린 박문서관 노익형 사장의 글을 보면 『순수문예서를 출판했다가 손해를 보았다. 염상섭씨라면 문단에 이름도 높으시고 해서 갈 팔리리라고 추측했었는데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것은 박문서관이 『현대걸작장편소설전집』을 간행한 결과를 두고 말한 것이다.
이광수의 『사랑』을 비롯해서 김동인· 염상섭· 현진건· 박종화· 김기진·나빈·한용운 등 지금 보아도 당당한 작가들의 작품들로 전10권을 출만한 것이다. 거기에 광고까지 큼직하게 냈다.
『일찍이 이렇듯 재미스런 소설이 있었던가. 이렇듯 호장한 전집이 또 있었던가. 과거 30성상의 역사를 가진 박문서관이 비로소 강호에 바치는 명 작가의 명 소설만 추려낸 대 전집이다』
이런 광고문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이른바 「얘기책」의 재미에서 벗어나려 들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박문서관은 제2기로 5권을 더 기획했다. 현진건의 『무영탑』, 박종화의 『대춘무』, 김동인의 『견훤』, 이광수의 『세조대왕』등이다.
박문서관은 이러한 문학서적 외에도 문세영의 10만 어휘가 넘는 『조선어사전』을 편찬해내고, 박문문고 22권을 출판했다. 이 문고는 학예사가 기획한 조선문고 20권과 함께 당시로서는 커다란 업적이었다.
나는 이와 같은 박문서관의 문화적 업적과 그 뚜렷한 출판관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창업주 노익형씨에 이어 그의 아들 성석씨가 가업인 박문서관 2대 사장을 맡았는데, 그는 제2고보 (경복고)를 거쳐 당시 우리 나라 유일의 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을 나온 지식인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이들 부자가 출판에 얼마나 큰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박문서관도 40년대 일제 말기와 해방 후의 혼란, 그리고6·25 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동기를 겪으면서 차차 기울기 시작했다.
거기에 2대 사장 노성석씨마저 지병인 고혈압으로 47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대 사장은 노성석씨의 고등학교·대학 동창생인 이응규씨가 맡아서 주식회사로 바꾸고 의욕적으로 회사를 일으키려고 노력했지만 6·25의 전화로 사옥은 물론 인쇄소마저 불에 타고 기계와 납, 그리고 귀중한 고서자료들마저 모두 도난 당하여 끝내 사세를 일으키지 못하고 폐업의 비운을 맞은 것이다.
만약 박문서관이 오늘까지 계속되었다면 적어도 우리는 80년 전통의 출판사를 갖게 되었으련만 생각할수록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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