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에「한·중·일 새 시대」가 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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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지난해 가을 전대통령의 방일로 한일간의 「새 시대」가 열렸다면 우리의 다음 과제는 또 하나의 인국인 중공과의 관계개선일 것이다.
금년에 들어 일본저널리즘은 한국과 중공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움직임에 주목, 여러 가지 관측기사들을 내세웠다. 예컨대 1월20일자 아사히(조일)신문은 「한국산업계에 높아진 중국열」이란 표제로 한국산업계는 지금 중국시장에 열띤 시선을 쏟고있다.
그 제1단계로서 현재 홍콩에 진출하고 있는 기업은 은행 10사를 비롯하여 75사, 중국진출을 위해 홍콩에 현지법인을 설치한 기업은 23사에 달한다고 보도하였다.
필자가 이 기사에 주목한 것은 일본과 중공, 미국과 중공사이에 국교가 성립되기 전 단계가 그랬듯이 우선 학자와 저널리스트, 체육인들의 왕래가 선행하는 법이고 무역을 통한 경제관계가 깊어짐으로써 국교를 위한 레일이 깔리게 되기 때문이다.
조일신문을 읽으면서 필자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9세기 전반기에 활약한 장보고의 업적이었으며 황해를 둘러 싼 한·일·중의 「새 시대」가 멀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신라말기의 해장 궁복(?∼846년) 일명 장보고는 홍덕왕 때 당나라로 가서 무령군소장을 지낸 다음 귀국, 1만의 병사를 얻어 청해(완도)에 진을 두어 당나라 해적을 소탕하고 당나라와 신라의 해상안전을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청해진을 거점으로 당·신라·일본간의 항로와 무역을 장악하여 황해를 둘러싼 해상의 「새 시대」를 열어 놓았다.
장보고의 명성은 일본사람들 속에 널리 알려지고 있다. 당에 유학하여 일본에서 천태밀교의 완성에 크게 공헌한 「엔닌」(원인·794∼864년)의 『입당구법순례행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원인은 장보고와 안면이 있는 축전태수(박다지방의 장관)의 소개장을 가지고 838년6월 일본을 떠났다. 6일간의 항해로 양자강하구에 도착, 양주를 지나 북상하여 초주, 해주로 갔는데 초주와 그 북방의 연주에는 신라사람들의 거류지, 신라방이 있었다. 길 안내와 통역은 신라사람이었다.
원인일행이 산동반도 선단에 있는 적산에 도작한 것은 이듬해 6월7일, 그곳은 장보고의 당나라에서의 활동거점으로 원인은 신라사람들의 활약에 감탄한다. 적산법화원은 장보고가 세운 절인데 신라승 30수명이 있었으며 법회에는 최고 2백50명의 신라사람들이 모였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신라국의 위신의 높음을 목격하게 된다. 그가 적산법화원에 들어간지 얼마 안 된 6월7일 신라 신무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신라로 가는 청주병마사 오자진일행을 법화원에서 만났고 청산서는 장보고가 임대사라고 불리고 있음을 알았다. 임은 장엄·웅대·윤미의 뜻으로 「임대사」는 그를 존경하는 찬칭인 것이다.
원인의 유학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법화원의 신라승 성임이었다. 그는 남쪽의 천치산으로 갈 생각이었으나 성림의 충고에 따라 서북방의 오대산을 찾기로 했다. 오대산으로 가는 길도 신라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공험(여행증명서)을 보이면 현지 관리들은 신라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오대산을 순례한 뒤 그는 장안으로 갔었다. 그리하여 845년 5월에 그곳을 떠나 귀일의 길에 올랐으나 적산서 신라배를 탄 것은 847년 9월2일, 박다도착은 9월18일이었다. 당시의 항로는 산동반도 선단에서 황해도의 몽금포를 향해 바다를 건너 신라서해안을 남하, 진도서 동진하여 거제도서 대마로 향했을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원인의 입당구법은 신라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었다. 사실 원인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면 신라사람들의 수가 당나라 사람들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9세기 전반기의 신라는 황해를 무대로 당나라와 일본의 문화를 연결해주는데 주동적 역할을 했으며 17∼19세기의 조선조도 같은 역할을 수행했었다.
임진왜란 후 중국과 일본사이에는 국교가 없었으나 조선조는 1607년에 덕천막부와 국교를 재개, 명치유신까지의 2백60여년간 선린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외교실무는 동래부사와 대마심주의 남당, 두 나라의 중요 사건들은 즉시 상호 통보했었다.
한편 우리측은 매해 수차 북경으로 사절을 보냈으며 그곳에서 입수한 중요 정보는 일본측에 전하고 일본의 정정 등에 대해서도 청나라에 알려주었었다.
청나라와 일본은 우리 나라와의 국교를 통해 서로 연결되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깊은 관계를 맺고있었다.
1609년의 기유조약에 의해 부산의 초량왜관(10만평)에는 5백∼6백명의 일본인이 상주, 외교·무역업무에 종사하였다. 일본으로부터 들어오는 무역품 중 은은 매년 청국으로 가는 사절단을 수행하는 상인들에 의해 북경으로 운반, 그곳에서 대일수출용 생사와 견직물을 구입하였다. 그 상품들은 부산으로 운반되어 왜관의 일본상인에게 넘겼는데 그것의 일본에서의 판매지는 경도였었다.
한편 수출용 은은 경도에서 특주되었으며 1684년부터 1710년까지의 27년간의 예를 보면 우리 나라를 거쳐 북경으로 간 은은 5만관여, 연평균 1만8천관을 넘었었다. 3국간에는 우리 나라가 주동하는 은과 생사의 무역로가 확립돼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무역로에 따라「세기초에는 고추와 담배가 일본으로부터 전해졌다. 고추가 우리의 식생활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다시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담배는 빠른 속도로 보급되어 얼마 후에는 인료과 함께 대청무역의 주상품으로 등장했었다.
신문보도에 의하면 금년 가을에 조선조 통신사의 전람회가 일본과 한국서 열린다고 한다. 통신사를 두고 말한다면 당대 제1급의 문인·학자·의사·화가들로 구성된 일행의 일본행은 12회, 그들은 강호(동경)까지 갔다 돌아오는 반년동안 각지서 학술·문화교류의 꽃을 피웠었다. 따라서 이번 전시회는 화려한 그림만이 아니라 17∼19세기 전반기 우리가 주동이 되어 전개된 동북아시아의 학술·문화교류를 보여주는 것으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공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한다는 기사를 두고 역사를 회고해 본 것은 다름이 아니다. 우리의 역사는 침략자를 물리치는 과감한 투쟁만이 아니라 우리가 주동이 되어 역사발전에 기여한 사실들을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역사상으로 보아 인국과의 새로운 관계 수립시에는 먼 앞날을 내다보는 안목과 과감한 결단이 불가피했었다.
중공의 경우도 그것이 요구되겠지만 동북아시아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해 우리가 주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진희<재일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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