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쾌락 맛본 그들, 죽음도 손에 넣으려는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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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0호 16면

윌렘 칼프의 ‘스틸 라이프 위드 드링킹-혼(Still Life with Drinking-Horn·1653),

사람이 꼭 배가 고파서 먹는 게 아니다. 외로워서도 먹고, 화가 나서도 먹는다. 먹어서 만족스럽고 먹어서 행복해지니 먹는 것은 가장 값싸게 육체적 생존과 정신적 생존을 동시에 보장하는 것이다. 최근 ‘먹방’의 대대적인 유행은 우리 사회의 정신적 허기의 한 단면 아닐까.


브라질의 잘나가는 집안 출신의 놈팽이들(그들은 스스로를 ‘쓰레기’ ‘개자식들’이라 불렀다)이 ‘비프스튜 클럽’이라는 이름 아래 모여든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고상한 취미 생활을 몰랐던 그들의 만남은 평범한 사람들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최고만 먹고 마시면서 특권을 과시하는 ‘재력가의 의식’이었다. 이런 취미들이 대개 그렇듯, 그렇게 22년을 보내던 모임은 시들해지고 있었다.


이때 루시디오라는 의문의 요리사가 등장해 클럽 멤버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콕 집어서 기가 막히게 요리해주었다. 그것은 새로운 기대였고, 흥분이었고, 쾌락이었으며, 삶의 의미의 재발견이었다. 그런데 만찬 다음날 그 음식을 가장 맛있게 먹은 멤버 한 명이 심장마비로 죽었다. 첫 번째 죽음이 만찬과 관련되었다는 생각을 할 수는 없었지만 다음달 또 한 명이 만찬 다음날 죽자 조금씩 의문을 갖기 시작했고, 세 번째 멤버가 죽었을 때는 거의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네 번째 멤버는 아예 죽을 줄 알면서도 만찬을 즐겼다.


모든 쾌락이 그러하듯, 아무리 맛있는 것이라도 매일 먹으면 그저 그런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식사라면? 세상 모든 게 시들하던 이 놈팽이들은 죽음이라는 절대성 앞에서의 쾌락이 극대화되는 것을 체험했다. 이것이 죽을 줄 알면서도 미식가들의 러시안 룰렛을 멈출 수 없었던 이유다. 이렇게 먹는 것은 과시와 쾌락이었고, 죽음과도 손을 잡았다.


그림의 메시지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충고윌렘 칼프(Willem Kalf·1619~1693)가 그린 정물화는 먹는 것과 과시욕, 죽음을 한 세트로 보여준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물소 뿔잔과 거대한 로브스터다. 물소 뿔 잔은 성 세바스티안의 순교 장면이 새겨져 있는 정교한 은세공품으로 받쳐져 있다. 성 세바스티안은 최초의 순교 성인으로 로마군들의 활에 맞아 순교했기 때문에 후에 활의 수호 성인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이 뿔잔은 1565년에 만들어져서 지금은 암스테르담 뮤지엄에 소장돼 있고, 그림은 암스테르담 활 길드에서 주문했다. 물소 뿔잔뿐만 아니라 은쟁반, 베네치아산을 모방한 투명한 유리잔, 페르시아 양탄자와 대리석 테이블 등 모두 물 건너온 진귀한 물건들로 17세기 당시 황금기를 맞았던 네덜란드의 경제력을 과시하고 있다.


남다른 삶을 과시하는 고급스러운 오브제들에 남다른 솜씨를 자랑하는 화가의 과시욕이 더해져 이 그림은 매우 클래식한 위엄을 가진 그림이 되었다. 마치 인물화를 그리듯 어두운 배경으로 등장하는 물건들이 뿜어내는 고귀함과 진귀함은 이 그림을 주문한 길드 회원들의 결속을 견고하게 다지는 역할을 한다. 특별한 물건을 끼리끼리만 향유하는 것은 자신들의 우월적 지위를 배타적으로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다.


그런데 이 과시와 쾌락 옆에 다른 것이 끼어들고 있다. 그림 속 잔은 반쯤 비워져 있고, 레몬은 껍질이 벗겨진 채로다. 방금 전까지 이곳에서 이 화려한 물건들을 누리고 있던 누군가가 덧없이 떠났다는 이야기다. 인생의 가장 화려한 순간에도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충고가 담긴 그림이다.


이런 류의 그림을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라고 부른다. 지상에서 누릴 것이 많을수록 죽음은 두려운 법이다. 바니타스 회화는 기본적으로 죽음을 생각하며 삶을 겸허하게 살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고 하지만, 그 이면에는 풍요로운 현세적인 삶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고 보존하고 싶은 욕망도 없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떠나도 그림은 남는다. 인생의 가장 화려한 순간은 그렇게 그림이 되었다.


비프스튜 클럽의 위험천만한 미각 탐닉은 이 그림에 담긴 순간을 원했다. 다섯 번째 멤버는 지상에서 가장 맛있고 행복한 식사를 하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만찬회는 이제 멤버들간의 공공연한 죽음의 의식이 되었다. 소설 속 라모스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인간은 더 많이 원하기 때문에 인간이다.”


모든 쾌락을 맛본 클럽의 멤버들은 죽음도 자기 손 안에 넣고 싶어했다. 미지로 남아있는 한 공포스러운 것이지만, 준비할 수 있다면 죽음의 공포감과 두려움은 줄어들 것이다.


다가온 100세 시대 … 웰다잉 연구 절실해져소설의 결말은 다소간 엉뚱하다. 멤버 중 아홉 명이 죽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요리사와 글을 남긴 뚱뚱한 다니엘 뿐이다. 자기 차례를 예감하고 있던 다니엘에게 스펙토르라는 남자가 찾아왔다. 이 남자의 이름을 인스펙토르(검사관)로 잘못 들은 다니엘은 멤버들의 죽음과 관련된 조사를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이름이 스펙토르인 이 남자는 뜻밖의 제안을 해온다.


이 대목에서 소설가의 상상력은 고삐가 풀린 듯이 금기를 넘어선다. 스펙토르는 신종 사업을 제안한다. 바로 죽음에 관련된 사업을 하자는 것. 그 사업은 “편안한 죽음, 시한부의 쾌락”을 보장하는 것이고 그것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실컷 먹여서 죽이는 일”이다.


이런 상상이 제대로 마무리될 리가 없다. 소설은 “다니엘, 그만해!”라는 외침으로 끝난다. 소설이 제대로 끝을 맺지 못했기 때문에 독자가 생각할 것은 더 많아졌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말할 수도 없고 말해서도 안되지만, 나의 죽음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할수록 좋다. 그것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소설 속 라모스는 세상 모든 것을 제대로 맛보고 감별하고 누리기 위해서, 지상에서의 더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영원히 시한부 상태로 사는 것을 택한다. 지금 내게 주어진 순간의 절대적인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것은 바로 죽음을 생각할 때다.


모든 노인들의 공통된 진짜 소망은 당연히 좀 더 오래 건강하게 사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잠자듯이 편안히 가는 것이다. 울면서 태어나서 웃으면서 죽고 싶은 거다. 그럴 수만 있다면야, 그거야말로 남는 장사 아닌가?


요즘은 웰빙만큼 웰다잉이 중요하다고 누구나 말한다. 근본적인 성찰 없는 웰빙은 그저 과시적인 유행이 되었고 마케팅의 일환이 되었다. 웰빙을 위한 상품구입이 웰빙을 대체하고 말지 않았는가? 웰빙은 삶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철학적 태도 변화에서 시작되어야 했다. 웰다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소설 속 스펙토르의 황당한 구상처럼, 베르베르의 소설 『타나토노스』처럼 죽음도 사업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죽음은 누구나 겪어야 하는 자연의 순리로, 새봄에 새 순이 잘 돋을 수 있도록 좋은 토양을 만들며 떠나주는 것이다. 100세 시대가 되었다는 것은 존엄사뿐만 아니라 좋은 죽음에 대한 연구가 절실한 시점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영육의 조화를 이룬 웰빙을 추구했듯, 죽음에서도 마찬가지다. 죽음의 육체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죽음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새순이 자라오는 새봄이 우리에게 묻는다. ●


이진숙 ?문학과 미술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각 시대의 문화사 속 인간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 시대를 훔친?미술』『러시아 미술사』『미술의 빅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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