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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타이 맨 친구 부럽지 않죠” 바다서 보물 캐는 청년 어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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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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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도시의 청춘들은 만원 버스나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학교로 직장으로…. 졸린 눈을 비벼 가며 꾸역꾸역 하루를 살아낸 청춘들은 밤이 깊어서야 각자의 안식처인 집으로 향한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탈출을 꿈꾸지만 기회는 드물다. 일 년에 한두 번 짧은 휴가를 받아야 겨우 탁 트인 바다를 구경할 수 있다.

[젊어진 수요일] 청춘리포트 - 바다로 출근하는 그들

여기, 버스·지하철 대신 배 한 척에 몸을 싣고 바다로 매일 출근하는 청춘들이 있다. 태양이 떠오르기 전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출근해 바다농장을 일군 뒤 석양을 등에 지고 퇴근하는 ‘청춘 어부’들이다. 이들에겐 정장과 구두 대신 방수복과 장화가 근무복이다. 어촌에서의 실제 삶은 어떤 모습일까.

지난달 29일 서울에서 자동차로 5시간 남짓 떨어져 있는 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를 찾았다. 포근한 항구 ‘어란진항’이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다. 그곳에서 1박2일 동안 ‘청춘 어부’의 일상을 따라가 봤다. 그들은 왜 어부의 삶을 택했을까. 도시의 청춘들이 스펙 쌓기와 승진에 매달릴 때, 바다에서 일하는 그들은 어디에서 삶의 만족감을 얻을까.

컴퓨터공학도 출신 박영재씨
새벽 6시 스마트폰으로 날씨 체크
10t 어선 몰고 전복 양식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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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터전 삼아 살아가는 ‘청춘 어부’들은 “바다에 내 꿈과 미래가 있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김기웅(28)·박영재(32)·고선호(24)씨. [해남=프리랜서 오종찬]

“어제 늦잠 자는 바람에 오늘은 좀 늦었네요.”

먼동이 터 올 무렵인 오전 6시30분쯤 어란진항에 나타난 박영재(32)씨가 웃으며 말했다. 멜빵이 달린 그의 방수복과 장화엔 하얀 염분이 먼지처럼 곳곳에 묻어 있었다. 박씨는 항구에 정박해 있던 9.77t 어선인 레전드호 시동부터 켰다. 레전드호 옆엔 1.24t 작은 보트인 프린스호가 묶여 있었다. 왼손으로 자동차 핸들같이 생긴 조타기를, 오른손으로는 변속기어의 형상을 한 속도조절기를 능숙하게 조작하며 배를 몰았다. 그가 향한 곳은 항구에서 배로 7~8분 떨어진 다시마 양식장이었다.

바다 한가운데 큰 직사각형 형태로 자리 잡은 양식장에는 스티로폼·플라스틱 부표가 잔뜩 달린 로프들이 80~100m 간격을 두고 떠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길게 자란 다시마가 붙어 있는 로프들이 촘촘히 연결돼 있었다. 전복과 김 양식을 주로 하는 박씨가 전복에 줄 먹이로 키우는 다시마 양식장이다. 키운 다시마는 전복이 자라고 있는 가두리에 던져진다.

“해수면이 가장 낮아지는 간조 시간이 오늘은 오전 9시50분이에요. 이 시간이 파도도 약해서 하루 중 가장 작업하기 편한 시간이죠. 양식장에 설치된 로프에 어린 다시마를 감은 로프를 묶어야 하는데 기존 로프가 물에 잠길수록 끌어올리기 힘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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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재씨는 조타실에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바다 날씨와 물때를 확인한다. [해남=조한대 기자]

박씨는 스마트폰으로 바다 날씨와 물때를 알려주는 애플리케이션을 보며 인도네시아 출신 외국인 선원 3명에게 이런저런 일을 지시했다. 가장 오래된 동료인 무하마드 아핍(25)은 박씨와 2년째 일하고 있다. 한국 어부들과 외국인 노동자를 연계시켜 주는 수협의 프로그램을 통해 이곳에 왔다. 프린스호로 옮겨 탄 박씨와 선원들은 부표가 달린 로프에 가까이 다가갔다. 어린 다시마를 감은 로프를 보다 팽팽하게 당기는 작업을 했다. 한쪽을 부표에 묶고 프린스호를 타고 반대편으로 와 힘껏 잡아당겨야 했다. 마치 줄다리기를 하듯 박씨와 직원들이 몸을 뒤로 한껏 젖히고 나서야 줄이 당겨졌다. 박씨는 “로프를 팽팽하게 당기지 않으면 옆 로프와 붙어 다시마가 충분히 자라지 못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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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가‘미역·다시마 종묘 부착기’로 어린 다시마를 로프에 감는 모습이다. [해남=조한대 기자]

박씨는 부모님과 함께 0.4ha(4000㎡) 규모의 전복 가두리 양식을 하고 있다. 140줄(한 줄당 110m) 규모의 김도 양식한다. 한 해 순수익은 어림잡아 5억원이 넘는다. 작은 기업체 대표 부럽지 않은 수준이다. 그러나 2012년 태풍 볼라벤이 왔을 때 전복 양식장을 송두리째 잃는 피해를 보기도 했다. 볼라벤은 2007년 태풍 나리 이후로 가장 강한 태풍이었다. 당시 피해액만 10억원이었다. 전 재산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2010년 처음 만났던 지금의 아내와 준비 중이던 결혼식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암담했죠. 3년간 고생하며 키워 출하를 앞둔 전복을 모두 잃었으니까요. 하지만 포기할 순 없었어요. 다시 도전했고 이제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는 20대 초·중반을 대학생 신분으로 보냈다. 한 지방대 자동차학과를 다니다 다른 대학 컴퓨터공학과로 옮겨 2012년에야 졸업했다. “대학 졸업은 하라”는 부모님 성화에 못 이겨 그나마 관심 있었던 자동차·컴퓨터 관련 학과에 진학한 것이다.

“자식이 바다 일을 하는 걸 원하는 부모님은 아마 없으실 거예요. 겉보기엔 여유로워 보이지만 실상은 고되고 힘든 일이 더 많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양식업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넥타이 매고 큰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아요. 바다엔 말 그대로 보물들이 잔뜩 깔려 있거든요. 이런 ‘노다지’를 두고 어딜 가고 싶겠어요.”

경찰 대신 김 양식 택한 김기웅씨
도시의 팍팍한 삶 싫어 귀향
일 고되어도 오후 2시면 취미생활

낮 12시 어란진항은 활기찼다. 부둣가를 따라 줄지어 선 크레인 10대가 200㎏이 넘는 김 포대를 7~8개씩 들어 올렸다. 포대마다 바닷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크레인 옆 덤프트럭에도 김 포대가 가득 실려 있었다. 김을 가공하는 공장으로 향하는 차량들이었다. 오전 내내 바다와 씨름하며 양식장의 김을 한가득 채취해 왔던 어부들은 자신의 빈 배를 청소하기 바빴다. 이곳에서 3.71t급 대영호를 청소 중인 김기웅(28)씨를 만났다.

200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 대학 경찰학과에 진학했던 김씨는 태권도 4단, 유도 2단의 유단자였다. 하지만 경찰의 길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한 학기만 다니고 그만뒀다. 이후 몇 년간 광주의 한 횟집에서 일했던 김씨는 도시의 팍팍한 삶이 지긋지긋해 2011년 고향인 이곳에 돌아왔다. 부모님이 하시던 180줄 규모의 김 양식장을 이어받은 그는 현재 연 순수익 2억원을 벌고 있다. 매일 오전 5~6시에 일어나 고된 일을 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김씨는 어부로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

“물론 도시의 세련된 오피스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가끔 부러울 때는 있죠. 하지만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바다 위에서 일해도 삶에 대한 만족도는 땅 위의 삶보다 더 높습니다. 일은 고되지만 도시처럼 빡빡하지 않거든요. 바쁠 때가 아니면 오후 2시 이후에 축구·배드민턴 같은 운동도 맘껏 즐길 수 있죠. 일주일에 2~3번 읍내 목욕탕 가는 게 요즘 새로 생긴 취미입니다.”

수산양식학 전공한 고선호씨
어릴 때부터 어부 되겠다 생각
새로운 해양작물 발굴하려 힘써

오후 2시가 가까워지자 어란진항 한쪽에 있는 ‘어불리 승강장’에 고선호(24)씨가 나타났다. 배로 5분 걸리는 어불도에 들어가기 위해서다.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어불도에 살았다. 아내가 해남읍의 한 병원에서 임상병리사로 일하게 돼 지난해 6월 섬을 나왔다. 그러나 여전히 어불도가 그의 일터다. 그는 부모님과 바다에서 전복을 양식한다. 섬에 도착한 고씨는 오토바이를 타고 선착장에서 2㎞ 떨어진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나이키 운동화에 청바지를 입고 있던 그는 집에 도착하자 장화로 바꿔 신고 방수복을 걸쳤다.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와 올라탄 배의 이름은 ‘써니’호다. 일본 만화 ‘원피스’에 나오는 해적선 ‘사우전드써니호’에서 이름을 따왔다.

“제가 원피스 광팬이거든요. 아버지께 배 이름으로 ‘써니’가 어떻겠느냐고 여쭤봤더니 흔쾌히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어부인 아버지를 보며 자신도 어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한국농수산대학 수산양식학과에 진학했다. 2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전복 양식에 뛰어들었다. 최근엔 고씨처럼 ‘청년 어부’가 되겠다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어불도 청년 회원이 점점 늘어 지금 40명 정도 됩니다. 폐교됐던 어린이집이 최근 다시 문을 열 정도예요. 지금 다섯 살인 제 딸을 몇 해 전만 해도 배를 태워 어린이집에 보냈는데 말이죠.”

써니호 위에서 전복 양식장에 먹이를 뿌리는 작업을 마친 그는 오후 7시쯤 일을 마치고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힘든 작업이었지만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집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다.

“여러 지역의 청년 어부들과 정보를 공유하며 새로운 해양 작물을 고민하고 있어요. 지금 전복 양식만 하고 있는데 새로운 먹거리를 발굴해야죠. 요즘엔 도시로 나갔던 친구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아요. 대학 나오고 아무리 높은 스펙을 쌓아도 미래가 불안하기만 한데 바다는 일하는 만큼 보상을 해주니까요. 이만큼 정직한 직업을 어디에서 또 찾을 수 있겠어요. 청춘 어부들에겐 취업난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에요.”

해남=조한대 기자 cho.hand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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