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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한인 피살 34명 중 33명이 현지정착인, 관광객은 한명도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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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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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앙헬레스에서는 한인 자율 파출소와 경찰서가 협력해 한인타운 을 순찰하며 범죄 예방 활동을 펼친다. 지난달 2일 이창호 필리핀 중부루손한인회 부회장(오른쪽 둘째)과 경찰관이 순찰을 돌고 있다. [사진 오종택 기자]

국내 모 지방대 교수로 있던 박모(68)씨는 필리핀 마닐라 인근 카비테주(州)에 사실상 ‘세컨드 하우스(별장)’를 마련했다. 7년 전 은퇴한 후 매년 수개월씩 필리핀에 머물며 골프 등을 즐겼다. 가족들도 종종 왔다. 하지만 행복한 노후는 오래가지 못했다. 지난달 22일 자택에서 흉기에 찔려 숨지면서다.

필리핀 'K크라임' 현장을 가다 <상> 현지 정착 한인이 피해자

현지에 파견된 한국 경찰청 수사관 5명은 폐쇄회로TV(CCTV)를 분석했다. 이어 사건 발생 시점 박씨 집에 출입한 20대 필리핀 여성 A를 유력 용의자로 체포한 뒤 살인 동기 등을 캐고 있다.

2000년대 중반만 해도 ‘K팝 열풍’의 진원지였던 필리핀이 지난 수년간 한인 피살사건이 잇따르면서 ‘범죄의 땅’으로 인식되고 있다. 2013년 이후 필리핀에서 목숨을 잃은 한인은 34명(30건)이다. 해마다 10명 이상이 숨졌다.

필리핀에서 20년 동안 사업을 해온 김모(50)씨는 “‘K팝’ 대신 ‘K크라임’이란 말을 써야 할 정도”라고 말했다. 한 해 120만 명에 달하는 필리핀 관광객들의 공포도 커질 것으로 예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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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본지가 경찰청과 외교부의 도움을 받아 지난달 1일부터 5일간 필리핀 마닐라·앙헬레스를 현지 취재하고 2013년부터 3년간 발생한 한인 피살사건을 전수조사한 결과는 의외였다.

이 기간 동안 피살된 한인 34명 중 관광객은 전무했다. 33명은 박씨와 같은 ‘로컬 코리아노(Local Koreano·필리핀에 정착해 현지인처럼 사는 한국인을 뜻하는 타갈로그어)’였다. 나머지 1명은 지난해 필리핀의 아들 집에 갔다가 이틀 만에 납치 살해된 홍모(74)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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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결과 피살자들의 평균 필리핀 체류 기간은 7.3년, 평균 나이 48.7세 남성이었다. 직업은 자영업자가 64.7%(22명)였다.

마닐라 소재 ‘코리안 데스크(필리핀에 파견된 한국 경찰)’에서 근무 중인 서승환(39) 경정은 “한인 피살사건 중 관광객 피해자는 없었고, 현지 정착 교민이 피해를 봤다”며 “피살 동기도 15건이 사업상 다툼이나 금전을 둘러싼 갈등·원한이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20일 필리핀 바탕가스에서 총에 맞아 숨진 조모(56)씨는 20여 년 전 필리핀에 정착한 한인 1세대다. 건축·임대업을 하는 자영업자였다. 또 30건 중 20건의 범행 도구는 총기였다. 필리핀에서 총기 소유는 합법이지만 불법 총기도 100만 정 이상 유통되고 있다고 한다.

청부살인 사건의 배후가 잘 검거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주 필리핀 한국대사관 홍덕기 치안영사는 “건맨(Gunman·살인 청부업자)은 잡혀도 금전적 지원이 계속되면 좀체 배후를 털어놓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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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한 수사력과 불안한 치안 상황도 한인 피살사건이 느는 주원인으로 꼽는다. 외교부에 따르면 지난 한 해 해외에서 피살된 한인 교민 35명 중 11명이 필리핀에서 피살됐다. 단일 국가 중 가장 많았다.

필리핀 자국 내 살인사건 수도 9945건(2014년 기준), 하루 27건꼴로 발생해 한국(938건)보다 10배 이상 많다. 하지만 인구가 1억 명인 필리핀에서 경찰 수는 14만여 명이다. 필리핀 인구의 절반 정도인 우리나라와 경찰 수가 비슷하다.

앙헬레스 코리안 데스크 이지훈(33) 경감은 “필리핀에서 범죄가 발생하면 경찰이 자기 돈으로 기름값을 내가며 수사해야 한다”며 “그 정도로 수사 의지가 약하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3일 찾은 수도 마닐라의 대표적 유흥가 말라테에는 술 취한 한인들이 고성과 욕설을 내뱉는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또 대로를 벗어나 조금만 들어가면 미로 같은 빈민가로 이어진다. 불빛조차 희미한 이곳에는 한 대의 CCTV도 보이지 않았다.

불법 사제 총기의 마구잡이 유통도 문제다. 현지 주민 R씨(57)는 “1만5000페소(38만여원)만 주면 38구경 사제 권총을 구할 수 있다”며 “등록증도 없고 어떤 기록도 없는 총”이라고 말했다.

현지인들을 무시하는 삐뚤어진 한인들의 행태도 ‘범죄의 뇌관’을 건드리는 요소다. ‘마야방(건방진 태도를 뜻하는 타갈로그어)’을 떠는 일부 한인 때문이다.

2013년 4월 앙헬레스 식당에서 식사하고 나오던 임모(34)씨 등 3명을 필리핀 강도가 총격으로 살해한 사건의 배후에도 정보를 제공한 전 운전기사가 있었다.

주필리핀 한국 대사관 신경서(52) 협력영사는 “한국인의 ‘갑질’에 앙심을 품은 필리핀인들이 고용주의 동선을 강도나 청부 살인업자에게 알려줘 살인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마닐라·앙헬레스(필리핀)=윤정민 기자 yunjm@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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