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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당신] 걸음 느려지고 발이 끌리면 뇌경색·파킨슨병 적신호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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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가늠자 걸음걸이

의사들은 환자가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만 봐도 어디가 아픈지 대충은 안다고 말한다. 걷는 모양새, 즉 걸음걸이가 진단의 주요 단서가 된다는 의미다. 걷는 행위에는 몸 상태가 투영돼 있다. 건강의 가늠자가 될 수 있는 이유다. 걸음걸이가 평소와 조금이라도 달라졌다면 몸 어딘가에 이상이 생겼다는 경고 신호다. 무관심하게 지나칠 수 있는 걸음걸이, 조금만 신경을 쓰면 심각한 질환을 조기에 발견하고 위험을 예방할 수 있는 좋은 예측인자다.

경기도 용인에 사는 류성만(78·가명)씨는 최근 길을 걷다 조그마한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이마가 15㎝가량 찢어졌다.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 봉합수술을 받은 류씨는 의료진으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뇌 영상검사상 다른 뇌 부위에 출혈이 진행되고 있음을 의심한다는 설명이었다.

정밀검사 결과 류씨는 후두부 안쪽에 1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미세한 출혈이 진행 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는 1주일간 해당 부위에 고여 있는 혈액을 뽑는 시술을 받고 나서야 퇴원했다. 류씨는 “평소 운동신경이 좋고 거동에 전혀 불편함이 없던 터라 넘어진 것이 이상했다”며 “생각해 보니 사고가 발생하기 며칠 전부터 오른쪽 다리가 조금씩 끌리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담당의사는 “류씨는 넘어지는 사고가 전화위복이 돼 뇌출혈을 발견했다”며 “평소 걸음걸이를 유심히 살피는 것만으로도 질환을 초기에 알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걸음걸이가 건강 지표가 되는 이유는 보행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정상 보행을 하려면 여러 요소가 충족돼야 한다. 보행은 운동기능·균형감각·적응력으로 이뤄진 복합체다. 얼마나 규칙적으로 걸음을 유지하는지, 주위 환경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 중심을 얼마나 잘 잡는지가 포함된다. 대뇌 전두엽에서부터 기저핵·소뇌·척수·신경근·말초신경에 이르기까지 신경이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한 곳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정상적인 보행이 불가능하다. 모든 보행장애에 신경계 질환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이유다.

자세히 관찰하면 걸음걸이 제각각

의학계에는 60세까지는 인구의 15%만 보행장애를 겪지만 85세 이후에는 이 비율이 82%까지 늘어난다는 보고가 있다. 나이가 들면서 각종 질환이 생기고, 초기 증상으로 보행장애가 생겨서다. 공통적으로 걸음이 느려지고 발이 끌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질환에 따라 저마다 변하는 양상이 조금씩 다르다.

우선 변하는 속도다. 걸음걸이가 갑자기 바뀌었다면 뇌혈관 질환 중 뇌경색일 가능성이 크다. 뇌혈관이 좁아지다가 어느 순간 막혀 뇌세포가 괴사해 뇌기능에 마비가 오는 질환이기 때문이다. 증상이 바로 나타난다. 하루아침에도 걸음걸이가 달라진다. 반면에 서서히 발이 끌리기 시작하고 걸음이 느려지는 질환도 있다. 파킨슨병과 파킨슨증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파킨슨병은 중뇌 흑색질 부위에 도파민 세포가 줄어드는 질환으로, 보행장애를 보이는 대표적인 신경퇴행성 질환이다. 뇌혈관 질환으로 파킨슨 증세를 보이는 혈관성 파킨슨병은 특이하게 계단식으로 변화가 진행된다. 나빠졌다가 괜찮아지고 다시금 나빠지는 식이다. 강북삼성병원 신경과 윤원태 교수는 “모두 그렇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걸음걸이 변화가 갑자기 생겼는지, 서서히 생겼는지는 질환을 가늠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둘째로 불편한 부위가 어딘지에 따라서도 질환이 갈린다. 좌우 한쪽에 마비가 오거나 거동이 둔해지면 뇌경색과 파킨슨병인 경우다. 양측 모두 걸음이 느려지고 불편하다면 혈관성 파킨슨병 등 파킨슨증으로 볼 수 있다. 또 팔다리 중 팔은 이상이 없는데 다리에만 힘이 빠지고 걸음이 느려지면 혈관성 파킨슨병과 정상뇌수압수두증을, 팔다리 모두 힘이 빠지거나 굳는 증상이 있다면 뇌경색과 파킨슨병을 의심해 볼 수 있다.

셋째로는 근력 저하 여부다. 뇌경색, 혈관성 파킨슨병, 정상뇌수압수두증은 근력 저하로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보행장애가 생기는 반면 파킨슨병·파킨슨증·선천성근육질환 등은 힘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동작이 느려지고 중심이 안 잡혀 섬세한 보행 연결동작이 되지 않는다. 고대구로병원 뇌신경센터 오경미 교수는 “의사는 걷는 모습을 보면 경험적으로 어떤 질환 때문에 보행이상이 왔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는데, 이는 질환마다 증상에 미세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터벅터벅 발자국 소리나면 퇴행성관절염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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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동작분석검사 진행 모습. 보행 데이터가 컴퓨터에 기록된다.

뇌경색 초기 환자의 3D 동작분석검사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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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소뇌경색 초기 환자의 3D 동작분석검사 고관절 움직임 그래프. 다리의 기능 감소가 확인된다.

걸음걸이로 증상이 드러나는 것은 신경계 질환뿐이 아니다. 골격계 질환 역시 보행으로 질환을 가늠할 수 있다. 척추 질환이 여기에 해당한다.

척추관협착증과 퇴행성경수증이 대표적이다. 모두 척추뼈 안쪽 신경이 지나가는 통로에 퇴행성 변화로 뼈가 자라는 질환이다. 척추관협착증은 주로 요추에, 퇴행성경수증은 목 부위에 생긴다. 중추신경인 척수를 자라난 뼈가 누른다. 그러면 손과 다리가 저려오거나 하지 근력이 줄어들면서 다리가 휘청거리고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겨워진다.

걸을 때 허리가 점점 굽는 증상은 퇴행성요추후만증 때문이다. 후만증은 척추 후방이 만곡을 그리며 굽는 것을 말한다. 나이 들어 골다공증까지 겹치면 굽는 증상은 가속화된다.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린 상태를 골다공증으로 약해진 척추 뼈마디의 앞부분이 견디지 못해 깨지고 아무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척추 각 뼈마디마다 부채꼴을 형성하면서 연결된다. 허리는 앞으로 계속 굽고 급기야 꼬부랑 할머니가 된다.

발자국 소리가 터벅터벅 나기 시작한다면 퇴행성관절염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정상보행에서는 엉덩이·허벅지 근력이 충분히 작용하는 상태에서 발뒤꿈치부터 땅에 닿으면서 자연스럽게 충격이 흡수된다. 하지만 퇴행성관절염은 무릎 안쪽 연골이 닳아 ‘O자’ 다리가 되고 엉덩이·허벅지·무릎으로 이어지는 균형이 깨져 근력이 떨어진다. 연결 동작이 잘 안 돼 터벅터벅 발자국 소리가 난다.

강북삼성병원 재활의학과 이용택 교수는 “걸음걸이는 골격계 질환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며 “하체 근력이 떨어지는 증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면서 걷는 자세와 속도가 평소와 달라지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3차원 동작 분석하면 정확한 진단 가능

전문가들은 평소 자신의 걸음걸이와 변화를 인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질환이 악화되기 전에 치료하고 낙상 등 더 큰 손상을 방지할 수 있어서다. 기력이 쇠해서 그러려니 생각하고 방치하면 낭패를 볼 수 있다.

고대구로병원 재활의학과 김우섭 교수는 나이가 들면서 몸에 한 군데라도 이상이 생기면 밸런스가 깨진다”며 “악순환을 거치면서 도미노식으로 무너질 수 있어 초기에 발견해 진단받고 치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3차원 동작 분석 시스템’이 도입돼 정확한 진단이 가능하다. 이 시스템은 최첨단 보행 분석 장비로, 보행과 관련된 인자를 모두 수치화한 시스템이다(사진). 단순히 육안에 의존하던 보행 분석을 최대한 객관화한 것이다. 수검자가 표지 장비를 팔다리에 각각 착용하고 정해진 거리를 왕복해 걸으면 가상 3차원 가상공간에서 컴퓨터가 분석해 발바닥에 각각 미치는 힘, 발목·무릎·고관절 움직임 등 20여 개 항목을 그래프로 나타낸다. 좀처럼 알아채기 힘든 미세한 변화도 잡아낼 수 있다.

김우섭 교수는 “최근에는 첨단 장비로 걸음걸이를 정확히 알 수 있다”며 “걸음걸이 변화에 관심을 가지면 건강을 유지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제대로 균형 있게 걷는다는 것은 큰 복”이라고 말했다.

류장훈 기자 j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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