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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경의 Shall We Drink] ④ 런던 펍 기행 1 - 궁극의 펍을 찾아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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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려앉은 런던의 템스강변, 조명을 밝힌 빅벤과 웨스트민스터 다리 풍경.

빅벤의 시곗바늘이 오후 6시15분을 가리키면, 짙푸른 런던 하늘에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빅벤은 영국 국회의사당의 시계탑으로 157년째 15분마다 종을 울리고 있다. 템스강 골든 주빌리 다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빨라진다. 거리 모퉁이 펍마다 갓 퇴근한 직장인들이 모여들어 시끌시끌하다. 손엔 하나같이 맥주잔이 들려있다. 표정이 달빛만큼 환하다. 하루의 무게마저 날려버린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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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산책로(The Queen`s Walk)에서 바라본 런던의 아이콘 빅벤.

‘하루의 마무리 = 펍에서 맥주 한잔’은 런던 사람들에겐 오래된 습관 같은 일상이다. 런던에 성업 중인 펍만 자그마치 7000여 곳. 대부분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 불릴 만큼 역사가 깊다. 웬만한 펍 문을 열고 들어서면 100년, 200년 전 풍경이 고스란히 펼쳐진다. 셰익스피어의 단골 펍이었던 ‘조지 인(The George Inn)’처럼 500년은 넘어야 오래됐노라 명함을 내밀 수 있다. 그러니까 소설가 찰스 디킨스, 조지 오웰이 드나들던 곳에서 맥주 한잔 하고 싶다면, 골목 안 오래된 펍으로 스며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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펍에서 맥주 한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런던 사람들.

단, 펍을 찾는 데는 눈치가 약간 필요하다. 종종 간판에 펍(Pub) 대신 인(Inn), 터번(Tavern)이라 쓰여 있는데, 16세기에 숙소와 술집을 겸한 인과 터번이 펍의 전신인 까닭이다. 인과 터번은 빅토리아 시대(1837~1901년)에 이르러 숙소의 기능은 사라지고, 맥주를 파는 ‘퍼블릭 하우스(Public House)’로 변모했다. 단지 맥주만 마시는 곳이 아니라 당대 지식인들이 문학과 정치를 논하는 공공장소로 발전했다. 펍은 퍼블릭 하우스의 줄임말이다.

올드 킹스 헤드(Old King's Head), 크로스 키(The Cross Key), 로즈 앤 크라운(Rose & Crown) 등 펍 이름이 암호명 같은 곳도 많다. 구분법은 간단하다. 왕이나 여왕의 얼굴, 장미와 왕관 등 그림간판이 걸려있다면 대부분 펍이다. 문맹이 많던 중세 시절 그림만 보고 알 수 있도록 큼직한 그림을 간판으로 내건 전통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기 때문. 거리를 걷다 펍 간판을 살펴보는 일 또한 런던 여행의 소소한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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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 앤 쇼벨(Ship & Shovell)에서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

조지 오웰은 『물에 잠긴 달(The Moon under water)』이란 에세이에서 ‘완벽한 펍이란 손님의 이름과 취향을 기억하는 바텐더와 맛있는 맥주, 빅토리아풍 인테리어를 갖춘 곳’이라고 했다. 아, 얼마나 멋들어진 조건인가. 낯선 이방인의 이름을 불러줄 바텐더는 없겠지만, 완벽한 펍을 찾아 코벤트 가든 근처 램 앤 플래그(Lam & Flag)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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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얼굴을 그려 넣은 펍, 올드 킹스 헤드의 간판.

아직 2월의 바람이 찬데도 펍 앞엔 서서 맥주를 마시는 이들이 꽤 많았다. 회식 중인 한 무리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스레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러자 그 중 한 남자가 ‘아직 자세를 잡지도 않았는데 사진을 찍느냐’고 농담을 건넸다. 모델이 되고 싶냐 물으니, 물론이라며 일행과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해줬다. 덕분에 한바탕 웃음으로 램 앤 플래그에 들어섰다. 

마냥 머물고 싶어지는 빅토리아의 라이브러리 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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펍 안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 고풍스러운 벽난로 등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실내장식이 푸근하게 느껴졌다. 친구와 런던 프라이드(London Pride)와 ESB(Extra Special Bitter)를 한 잔씩 사 들고 자리를 잡았다. 150여 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여기서 맥주를 홀짝인다면, 작품 구상 중인 찰스 디킨스를 엿볼 수 있으리란 상상만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1623년에 문을 연 램 앤 플래그는 찰스 디킨즈가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를 구상한 곳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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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펍, 조지 인(The George Inn)의 간판.

다음 날엔 조지 오웰이 언급한 ‘빅토리아풍 인테리어’에 충실한 펍을 찾아 나섰다. 1838년 문을 연 ‘빅토리아(The Victoria)’는 19세기 빅토리아 양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특히, 서가와 벽난로, 오래된 가죽 소파가 놓인 2층 라이브러리 룸은 우아하고 아늑했다. 어둡고 축축한 날씨에 난로 가에서 마시는 맥주 한잔은 삶의 온기였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책 한 권 집필한 작가도 있겠다 싶었다. 바텐더에게 물으니 찰스 디킨스가 이곳에서 『우리 모두의 친구(Our Mutual Friend)』를 썼다고 했다. 

빅토리아 여왕이 다녀간 펍, 빅토리아에서 마신 맥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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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처럼 빅토리아 여왕도 목을 축이고 간 펍으로도 유명하다. 빅토리아 여왕은 무슨 맥주를 마셨을까 궁금해하며 황금빛 올리버 아일랜드 골든 에일(Oliver's island golden ale)을 한 모금 넘겼다.

빅토리아를 나서는 길,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봤다. 들어갈 때 보지 못했던 작은 초록색 입간판이 눈에 띄었다. 이런 글귀가 분필로 쓰여 있었다. 

‘우리 펍으로의 여행은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경험입니다(A Trip to our pub is an experience that chalk is unable to conv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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