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나 아닌 우리, 탐욕 사회 탈출의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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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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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시사회
폴 로버츠 지음
김선영 옮김, 민음사
392쪽, 1만8000원

미래도, 공동체도 생각 않고
눈앞 이익 챙기기에 바쁜 현실
금융제도 개혁, 기후변화 대처…
당장 나서지 않으면 공멸 위기

미국 저널리스트인 지은이는 게임중독센터를 찾았다가 무한궤도, 즉 다람쥐 쳇바퀴 같은 게임세계의 논리를 발견한다. 게이머들은 길고 긴 시간을 투자해 공략법을 터득한다. 게임업체는 이를 바탕으로 중독성이 더 강한 업그레이드판을 개발한다.

게이머들은 실체 없는 ‘레벨 업’을 하며 힘을 키우고, 그 대가로 게임업체는 수익을 올린다. 게이머들은 자아성취를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지만 실상은 육체적으로 허약해지고 정신적으로 황폐해지며 경제적으로 궁핍해질 뿐이다. 중독자들로 우글거리는 불건전한 시장은 게임업체들에게도 반가운 상황이 아니다.

 지은이는 이런 상황을 두고 ‘디지털 담론이 지배하는 후기산업사회에서 모든 시민이 마주칠 딜레마의 핵심’이라고 지목한다.

현재 사회는 미래도, 공동체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나만의 이익만 추구하는 도도한 탁류가 지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서로 공멸 중인 게임 산업이나 현재의 사회나 별 차이가 없다는 이야기다. 지은이는 이런 사회를 근시사회, 또는 충동사회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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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1573∼1610)가 그린 ‘나르시스’. 자기 만족은 ?근시사회?의 특징 중 하나다. [사진 민음사]

 현상을 살펴보자. 요즘 기업인들은 장기간에 걸친 사회적 비용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익 확보만 생각한다는 게 지은이의 불만이다. 그 사회적 대가는 심각하다.

딜로이트 연구에 따르면 1981년 불황 때는 이익감소의 절반을 인력감축으로 메웠다. 90년 불황 때 이 수치는 4분의 3으로 늘었다. 2001년과 2007년 불황에서 노동은 전체 감축의 98%를 부담했다. 전에는 위기가 닥치면 기업들이 노동자를 보호하고 손실을 분담했다.

하지만, (주주 입김이 강해진) 세계적인 경쟁사회에서는 기업들이 고용을 희생해 이윤을 유지할 방법을 찾는다. 그 결과 경기침체가 올 때마다 투자자들은 비용절감으로 더 많은 이득을 얻었고 고통은 노동자들에게 전가됐다.

 기술혁신으로 일자리가 사라지는 사례도 수두룩하다. 전문직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현실을 보자. 미국은 법대 졸업생 대비 일자리 비율이 2대1이다. 런던의 법률회사 수습직 평균 경쟁률은 65대 1을 넘는다.

법률회사들도 비용 절감에 예민해졌을 뿐 아니라 사무자동화로 인력 수요가 확 줄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도 지속가능한 사회 발전을 생각하는 사람보다 현재의 찬사와 인기, 득표에만 눈이 어둡다. 우리 모두의 미래를 만들어나가기보다 당파성에만 몰두한다.

 지은이는 소비자 사회의 도래도 근시사회를 만든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70년대 이후 컴퓨터가 나오면서 소비자 시장은 단순히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건을 공급하는 욕망 충족의 기능을 넘어 우리 삶의 정체성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됐다.

지은이는 이를 두고 시장과 자아가 통합됐다고 표현한다. 문제는 시장과 자아가 통합되면서 돈이 되는 개인용 상품만 끝없이 나올 뿐 우리 모두를 위한 공공재, 예를 들면 도로와 다리, 교육, 과학, 예방의학, 대체에너지를 위한 공공 투자는 부족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은이는 이런 문제점 속에서 해결 방안을 찾는다. 탐욕스러운 금융제도를 개혁하는 일, 우리 모두를 위협하는 기후변화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불평등의 가장 큰 사례가 되고 있는 건강보험 개혁 방안 등 ‘내’가 아닌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 나갈 길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 그가 제시한 대안이다.

결국, 개개인이 나서서 지금의 작은 이익 대신 인간 영혼의 웰빙이나 가족이나 공동체의 미래와 같은 본연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내 안의 이기주의를 다스리고, 정치인을 올바르게 뽑고, 기업을 감시하는 일은 간단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을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해결은 더욱 요원해진다는 게 지은이의 외침이다.

[S BOX] 판결 예측력, 변호사 59%인데 컴퓨터는 75%

2011년 월가 점령 시위가 한창일 때 영국의 신참 변호사는 ‘변호사도 일자리 구하기 힘들다’라는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당시 별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지은이는 후기산업사회에서 심각하게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고 지적한다.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를 이용해 재판 결과를 예측하는 이른바 ‘정량적 법률예측(QLP)’이 본격 도입되면 법률 업계는 생존위기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변호사들의 예측력은 59% 정도지만 컴퓨터는 법원 판결의 75%를 예측할 수 있다. 과거 산업화 시대에 기술혁신은 수많은 일자리를 낳았지만 디지털 시대인 지금은 고도 전문직을 포함해 있는 일자리도 앗아갈 판이다.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지은이의 주장이 섬뜩하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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