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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특명, 중원을 장악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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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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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한국 정치를 주재하는 신(神)이 있다면 묻고 싶다. 그는 과연 삼당 구도를 용인할까. 혹은 점술가의 신기를 빌려 여의도 혼백에 물어본다면 제3당의 출몰을 그냥 예쁘게 봐줄까. 아닐 거다. 한국 정치의 신령은 두 개 이상의 정당이 난립하는 꼴을 봐준 적이 없고, 다당제가 체질에 맞지 않는 여의도 지신(地神)도 툭하면 불편한 심기를 뿜어낼 거다. 삼당 구도를 향한 정가의 눈물겨운 이합집산에 미리 초 치고 싶지는 않지만, 이 죽음의 늪 같은 양당체제에서 탈출하려면 대통령제를 폐기하고 내각제로 전격 돌아서거나, 영호남·충청·경기도민 절반가량을 무작위로 집단 이주시키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이다.

주류서 밀려 뛰쳐나온 세력은
언제나 무주공산 중원을 노려
‘국민’은 그들이 애용한 흥행문패
안철수는 빈사의 야당 회생시킬까
기지·무예 겸비한 김종인에 맞설
책사가 없어 험난한 길 예고

정당의 골격이 이렇게 단단히 고착된 것은 한국만이 아니다. 1920년대 대중정당이 출현한 이후 거의 100년 동안 유럽의 정당 역시 초기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 양차 대전 이후 유럽의 정치 지형에 급격한 변동을 초래한 요인은 많다. 복지국가, 극우파와 극좌파, 생태주의, 신자유주의, 노동계급의 중산층화가 계급투표 전선을 끈질기게 교란했다. 어떤 성급한 정치학자는 유럽정치에서 계급투표는 끝났다고 선언할 정도였다. 정권교체가 있긴 했어도 유권자의 정당정체성은 대체로 희석되지는 않았다. 다만 유권자의 선택 변화는 진영 ‘간’이 아니라 진영 ‘내’에서 일어났다. 보수연합과 진보연합을 가르는 경계선은 여전히 두꺼웠다. 신생 정당이 노리는 중원(中原)은 항상 제집으로 회귀했고, 그 결과 해체되거나 군소 정당에 머물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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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한국 정치사에 명멸한 정당이 모두 300여 개에 달한다면 놀랄 것이다. 그럼에도 교섭단체의 조건을 충족할 제3당이 하나도 없다면 더욱 이상한 일이다. 가장 눈에 띄는 제3당은 14대 총선(1992년)에서 31석을 획득한 정주영 회장의 통일국민당. 돈의 힘이 주효했는데 곧 여당으로 되돌아갔다. 여권이든 야권이든 주류에 밀려 뛰쳐나온 세력은 언제나 무주공산 중원을 노렸고, ‘국민’은 그들이 애용했던 흥행문패였다. 조순의 ‘민주국민당’(2000년), 이인제의 ‘국민신당’(1997년), 정몽준의 ‘국민통합21’(2002년), 박세일의 ‘국민생각’(2012년), 그리고 안철수의 ‘국민의당’까지. 출발은 원룸 정당이지만 결국 소셜 믹스(social mix) 대단지 ‘포괄 정당’이 된다는 자기 예언적 환상이 돌출했는데, 이들의 짝사랑은 대체로 ‘장대한 포부’로 끝났다.

2년여의 혹독한 정치 수업을 이수하고 응급실로 돌아온 수련의 안철수는 오랫동안 빈사 상태를 헤맨 야당을 회생시킬 수 있을까. 그의 탈당과 창당이 야당 해체에는 일단 성공했으나 참하고 단단한 신생 야당을 탄생시킬지는 아직 미지수다. 제발 그러기를 바란다. 그런데 새로운 가치, 비전, 행동을 외치는 그가 고심 끝에 내건 현판이 하필 고리타분한 ‘국민의 당’이어야 했나? 조선 말기 의병처럼 나라 망치는 정치인을 내쫓는 국민의당(義黨)으로 했으면 차라리 전율했을 것을. ‘더불어민주당’도 좀 웃기는 이름이니 피장파장인데, 명의(名醫)를 자처하는 노회한 정객 김종인의 등장으로 수련의 안철수의 존재감이 확 쪼그라든 것이 위기라면 위기다.

김종인은 제갈량의 기지와 조자룡의 무예를 겸비한 인물이다. 유아독존적 기질이 최대의 적이기는 하지만, 야권 재정비에 매진하는 그와 대적할 안철수의 책사가 없다는 점이 험난한 길을 예고한다. 교수들이 그렇듯 한상진은 쟁점 점화에는 익숙하나 답은 미약하다. 그가 만든 중민론(中民論), 고학력 전문직 중간층이 진보적 중원에 널리 포진해 있다는 이론은 90년대 얘기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그렇다고 김종인의 특허인 ‘경제민주화’가 유권자들을 매혹하는 것도 아니다. 김종인의 ‘포용성장’, 안철수의 ‘공정성장’은 거기가 거긴데 사회 주변부에서 불안에 떠는 청장년 세대가 감동할 리 없다. 분배와 관련해 증세나 용도 논쟁에 이르면 저항은 의외로 거세질지 모른다. ‘야권 재무장’ ‘호남의 사위’ 따위의 식상한 슬로건으로는 정치 신령의 고집을 넘어설 수 없고, 온갖 잡박(雜朴)들로 어지러운 여당조차 감당하기 어렵다. 바야흐로 중원 혈투가 임박했다.

중국의 삼국시대, 중원 장악의 고비가 적벽대전이었다. 조조의 대군을 물리칠 화공(火攻)을 고안해낸 것은 제갈량이 아니라 동오의 장수 황개(黃蓋)였다. 사슬로 연결한 조조의 연환선(連環船)을 마른 섶과 갈대에 기름을 부은 위장선(船)으로 접근해 불을 붙이는 것. 마침 바람이 길을 바꿨다. 화공은 위력을 발휘했고 조조의 군사는 괴멸했다. 바람길이 바뀐 것은 천운이었고, 천운은 민심이었다. ‘하늘의 바람을 바꾸고, 물 위에 불을 일으켜라!’ 촉한(蜀漢)의 유비가 중원의 주인이 된 것은 그의 민생철학을 천신(天神)이 알아준 덕분이었다. 안철수와 김종인, 조조의 남하를 저지하고 중원을 장악할 화공은 있는가?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도대체 중원은 어디인가?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