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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가족] 암세포 쫓는 유전자 연구 30년, 암 치료 '마에스트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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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차병원 김주항 교수는 국내의 암 유전자 연구 분야를 선도하고 있으며, 신약 임상시험과 체계적인 항암요법으로 암 치료 수준을 높여가고 있다. [사진출처=프리랜서 김정한]

오케스트라는 완벽한 화음을 낼 때 가장 빛난다. 지휘자는 여러 악기의 음색이 튀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조율하며 아름다운 하모니를 선사한다. 암 치료도 오케스트라와 비슷하다. 진단과 수술, 방사선 치료, 항암치료를 담당하는 각 전문 진료과 의사가 모여 암을 극복하도록 돕는다. 의료진은 토론을 거쳐 환자에게 최적의 치료법을 제시한다. 여기서 종양내과 의사는 지휘자 격이다. 암의 본질을 가장 잘 알고 있어 치료의 전 과정을 조율하고 중재한다. 30년 넘게 암을 치료·연구한 종양내과 의사라면 ‘마에스트로’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바로 암 치료의 권위자로 꼽히는 분당차병원 종양내과 김주항 교수 얘기다.

[명의 탐방] 분당차병원 종양내과장 김주항 교수

김주항 교수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싶다”란 포부를 안고 종양내과의 길로 들어섰다. 암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컸던 때다. 하지만 도전정신은 곧 좌절과 혼란으로 바뀌었다. 암을 치료하는 임상의사로서 느낀 한계 탓이다. 1980년대 후반만 해도 항암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위암·폐암·유방암·대장암등 암 종류의 구분 없이 약을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김 교수는 “치료법과 약이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무수히 많은 환자를 눈앞에서 잃었다”고 회상했다. 좌절감과 무력감에 휩싸였던 그때, 김 교수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미국 국립보건연구원 산하 국립암연구소에서 종양 분자생물학을 공부했다”며 “종양유전자·종양억제유전자를 배우면서 신세계에 눈을 떴다”고 말했다.

공을 들인 연구 분야 중 하나가 종양억제 유전자인 ‘P53’이다. 우리 몸의 세포가 발암물질에 노출되면 DNA는 변화를 거듭하다 암세포로 발전한다. P53은 유전자 이상, 돌연변이를 감지한다. 암세포로 바뀌지 않도록 교정해 정상으로 되돌려 놓거나 사멸시킨다. 김교수는 “암세포에 종양억제유전자를 보충하면 암이 약해진다는 원리를 깨달았다”며 “지금껏 유전자 치료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분야 개척 위해 종양내과 선택

국내에 돌아온 김 교수는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임상의사’의 길을 걸었다. 치료의 한계를 몸소 경험했던 터라 새로운 치료법 개발은 시대적 소명과도 같았다. 2000년대 초반 국내에 표적치료제가 등장하면서부터 항암 치료·연구는 급물살을 탔다.

끈기 있게 시도한 유전자 연구에서도 차츰 성과가 나타났다. 정상세포에는 영향을 주지 않고 암세포만 골라 파괴하는 유전자 치료법을 개발한 것이다. 김 교수는 “유전자 치료의 관건은 유전자를 세포 안으로 집어넣는 기술”이라며 ”암세포에 유전자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바이러스를 이용했다”고 설명했다. 토종 기술로 이뤄낸 연구 업적으로, 당시 유전자 치료 연구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토종 기술로 이뤄낸 연구 업적

항암치료에 매진한 김 교수는 환자와의 추억도 많다. 폐암 4기로 병원을 찾았던 여성 환자가 그렇다. 표적치료제 덕분에 새 삶을 살게 된 경우다. 김 교수는 “10년 전만 해도 폐암 4기는 생존이 힘들었다”며 “다행히 환자는 표적치료제가 잘 맞아 효과가 좋았다. 지금까지 노래강사를 하며 즐거운 인생을 사는 분”이라고 미소를 지었다.

반면에 안타까움을 진하게 남기고 떠난 환자도 있다. 똑같은 폐암 4기 여성 환자로 표적 치료를 받으며 병세가 호전됐다. 그러나 몸 상태가 나아지자 병원에 발길을 뚝 끊었다. 임신과 출산에 대한 간절함 때문이었다. 김 교수는 “환자는 본인의 생명이 달린 문제임에도 아기를 위해 1년간 치료를 쉬었다”며 “출산 후 병원을 다시 찾아왔지만 병세가 악화돼 손쓸 겨를도 없이 환자를 떠나보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암환자를 치료하다보면 환희와 절망감이 자주 교차한다”며 “그때마다 인간의 본질과 생명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된다. 이것이 포기하지 않고 암에 매진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임상시험을 진행하며 신약 개발에 일조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김 교수는 “임상시험은 표준치료로 효과가 없는 환자에게 새로운 치료법을 경험할 기회를 제공한다”며 “약의 효과를 규명하고, 새로운 치료법 개발에 기여한다는 의미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전했다. 그의 공로는 이제 의학계뿐 아니라 정부에서도 인정할 만큼 차곡차곡 쌓였다. 분자생물학 연구 및 유전자 치료 연구의 활성화, 신약임상연구를 통한 국가 암 관리 사업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3년 홍조근정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하지만 김 교수는 안주하기보단 또다시 새로운 길을 택했다. 수십 년간 몸담았던 세브란스병원을 떠나 지난해 9월 분당차병원으로 둥지를 옮겼다. 그동안 축적한 치료·연구의 노하우를 차병원에 접목하기 위해서다. 아예 손발을 맞춰 왔던 의료진 5명도 함께 옮겼다. 이들은 분당차병원 ‘암신약연구센터’에서 항암제에 내성이 생긴 환자를 대상으로 3세대 표적치료제 임상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유전체 정보를 활용한 맞춤 암 치료도 시작했다. 김 교수는 “차병원의 암 치료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팀의 역량이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며 “체계적인 치료가 이뤄질 수 있도록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것부터 진행중”이라고 설명했다.

암세포만 골라 집중 파괴
유전자 치료법 업그레이드
신약 개발 임상시험 진행

유전자·세포 치료 접목해 시너지 기대

차병원은 전통적으로 세포 치료·연구에 강하다. 김 교수의 유전자 연구와 차병원의 세포 치료 연구의 노하우가 만나면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만하다. 그는 “이상이 있는 유전자 특성을 찾아 적합한 치료제를 사용하면 치료 효과를 높일 수 있다”며 “개인별 맞춤 치료를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아직 유전자 치료는 초기 단계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한참 남았다. 김 교수는 “차병원에서 하던 면역세포치료를 병용하면 항암 효능을 증진시킬 수 있을 것”이라며 “치료·연구의 개선점을 찾아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암세포는 변이와 위장에 능하고 생존 본능이 강하다. 그럴수록 의사는 더 끈질기고 집요하게 암세포를 추적하고 공략한다. 1980년대만 해도 암환자 완치율은 30%에 머물렀다. 이후 2000년대 50%, 2010년 60%를 거쳐 최근에는 70%까지 올라섰다. 김 교수는 “반대로 생각하면 여전히 30%는 암으로 사망한다”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그는 암환자의 희로애락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의사다. 김 교수는 “무턱대고 환자에게 나를 믿으라고 할 순 없다.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최적의 치료법을 제시해 설득하는 게 내 역할”이라며 “모든 일에 진심을 다하면 안 될 일이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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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 기자 kim.suny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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