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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샌더스 … 아웃사이더들, 아이오와서 사고 치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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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호 6 면

민주당의 버니 샌더스 후보(앞줄 가운데)가 지난 19일 아이오와주 서부 도시 수시티의 극장에서 연설을 한 뒤 부인과 며느리, 손자·손녀와 함께 인사하고 있다.

지난 19일 아이오와주 윈터셋에서 유세를 한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자신에 관한 기사가 실린 시사주간지 타임을 들고 있다. [AP=뉴시스]

미국 대선전이 2월 1일 코커스(caucus)가 열리는 아이오와에서 공식 개막된다. ‘포스트 오바마 시대’를 열 새로운 리더십의 탄생 과정은 미국 사회의 에너지와 모순, 고민들이 함께 폭발하는 시기다. 중앙SUNDAY는 미 대선전의 이슈와 판세, 그 이면에 깔린 역사적 배경과 사회·정치적 함의를 입체적으로 짚어보는 기획을 준비했다. 미국 정치 전문가들이 쓰는 ‘미국 대선 코드 읽기’다. ?편집자

2016년은 미국 대선의 해다. 실제로 45대 미국 대통령을 선출하는 투표일은 11월 8일이지만 지난해 여름부터 언론의 헤드라인은 온통 후보들과 토론회, 경선에 관한 것이었다. 이번 대선의 가장 큰 특징은 아웃사이더들의 대활약으로 인해 누가 양대 정당의 대권 후보가 될지 예측을 불허한다는 점이다.


지난해 8월 폭스방송 주최 공화당 후보 토론회를 기점으로 대선 예비 후보들의 각축전이 시작됐다. 당시만 해도 최대 관심사는 1992년 ‘아버지 부시’와 ‘남편 클린턴’의 격돌 이후 24년 만에 또다시 ‘부시 대 클린턴’ 대결이 성사될지였다. 공화당 후보로는 아버지와 형에 이어 동생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가, 민주당 후보로는 퍼스트레이디와 뉴욕 연방 상원의원, 그리고 4년간 국무장관을 지낸 힐러리 클린턴이 지지도와 자금 동원력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후보들 간 토론회가 거듭되면서 예상치 못한 반전이 속출했다. 공화당의 경우 열정적 연설로 보수 백인 서민층의 불만을 자신에 대한 지지로 바꾸는 데 성공한 뉴욕 출신 부동산 재벌 트럼프가 무서운 기세로 치고 나왔다. ‘노조와의 전쟁’으로 보수층의 기대를 받았던 워커 위스콘신 주지사는 트럼프의 위세에 눌려 일찌감치 사퇴했다. 공화당 지도층(establishment)을 대표하며 교육·이민 분야에서 온건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젭 부시도 ‘서당 훈장’ 같은 스타일로 인해 현재 한 자릿수 지지율이다.


힐러리, 아이오와 1위 해도 안심 못해 민주당 사정도 마찬가지다. 힐러리 클린턴이 경선에 뛰어들면서 내세운 전략은 ‘겸허한(going small) 힐러리’ 이미지 만들기였다. 60년 케네디에게 근소한 차로 패배했던 공화당 후보 닉슨이 68년 8년 만에 다시 대권에 도전하며 내세웠던 ‘뉴 닉슨(New Nixon) 전략’ 따라 하기다. 그런데 자신의 집 지하에 개인 서버를 설치해 장관 시절 국무부 공식 e메일 이외에 별도의 e메일 계정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폭로되며 신뢰성 문제가 불거졌다. 이후 강력한 라이벌 샌더스 후보가 정책을 놓고 토론하자며 ‘e메일 게이트’에 면죄부를 줬고, 바이든 부통령의 불출마 선언에 이어 벵가지 미국 대사관 피습 관련 청문회에서 선방하면서 힐러리 대세론은 다시 탄력을 받는 듯했다. 하지만 최근 일부 여론조사 결과 아이오와주에서 샌더스 후보에게 뒤지는 것으로 나타나며 힐러리의 앞길은 예상보다 수월치 않아 보인다.


아웃사이더 돌풍의 원인과 영향은 무엇일까. 우선 미국의 전문가들조차 속 시원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트럼프 열풍에 대한 해석이 간단치 않다. “미국 국민이 기존 정치권에 대해 느끼는 극도의 실망이 분노 수준”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물론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는 불법 이민자 문제, 이슬람 테러집단과 이란의 핵무장에 대한 유약한 대처와 무한 양보, 낙태·동성애·총기규제·기후변화 등 주요 이슈들에 대한 진보 세력의 주도권 행사 등으로 인해 미국의 보수 유권자들은 매우 화가 나 있다. 하지만 트럼프 현상을 제대로 파악하자면 먼저 트럼프 개인을 살펴봐야 한다. 라티노 이민자들을 범죄시하고 토론 사회자인 여성 앵커를 비하하며 “한국은 미국이 지켜주는 안보에 한 푼도 기여하지 않는다”거나 “9·11 때 뉴저지에서 무슬림들이 환호한 것을 목격했다” 등의 막말과 과장, 거짓과 억측으로 선거 운동을 이어가는 트럼프다.


그의 유세와 인터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통의 요소들이 있다. 미국의 자존심을 부추기는 강력한 메시지, 복잡해 보이는 이슈에 대한 단순한 해법, 자신의 지지율에 대한 끊임없는 자랑이다. 그에 따르면 불법 이민을 막을 미국 남부 국경선 장벽 비용은 멕시코 정부가 내야 하고, 북한 핵 문제는 중국에 대한 무역 압력을 통해 해결하면 된다. 성공한 보수 대통령 레이건의 향수를 자극하고 다인종 사회에서 오히려 역차별받는다고 느끼는 보수 백인 남성 서민층의 울분을 대신 토로해 주는 식의 선거운동이다. 트럼프 현상으로 인해 ‘낙마(落馬)의 정치학’ 연구를 새로 해야 할 판이다. 보통의 정치인이라면 중도탈락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실언과 무지, 개인적 스캔들, 선거자금 부족 등 그 어떤 요소도 트럼프에게는 전혀 통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트럼프의 철저한 비즈니스맨 심리를 고려할 때 어떤 이유에서건 지지도가 급속히 빠질 경우 공화당 주류의 경선 개입을 맹비난하며 자진 사퇴할지 모른다. 그 경우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무소속으로 끝까지 대선을 완주할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민주당의 아웃사이더 샌더스는 어떤가. 미국 동북부의 작은 주 버몬트 출신으로 연방 하원의원을 지낸 그는 트럼프와는 전혀 다른 유형의 정치인이다. 당선된다면 미국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75세)으로 기록될 샌더스 상원의원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는 경제적 불평등 해소를 통해 몰락하는 미국 중산층을 되살리는 일이다. 전 국민 의료보험 보장을 전면 실시하고 월스트리트 규제를 대폭 강화하자는 입장 때문에 사회주의자로까지 불리는 그의 지지층을 살펴보면 민주당 진영의 구성도 그리 단순치 않음을 알 수 있다. 혁신(progressives) 세력으로 불리기 원하는 상당수 민주당 당원 관점에서 볼 때 힐러리는 지나치게 중도파다. 96년 재선 당시 복지정책 등을 놓고 남편 빌 클린턴 대통령이 취했던 보수층 영합주의 전략에 대한 앙금이 민주당 혁신파에게는 아직도 생생하다. 그들이 예상하는 힐러리 대통령은 여전히 월스트리트와 가까울 것이고 자유무역 정책을 통해 노조보다 대기업 편을 들 것이다. 게다가 청년, 여성, 동성애자, 라티노, 흑인 위주의 오바마 핵심 지지그룹이 오바마가 빠진 2016년 대선에서도 여전히 높은 민주당 충성도를 보여줄지 미지수다. 이 또한 힐러리의 대항마 샌더스에게 지지세력이 분산되고 있는 한 요인이다.


여론조사를 통한 가상 경쟁이 아닌 당원과 주민의 표로 등수가 매겨지는 실전 무대가 2월 1일 개막되는데 그 첫 격전지가 아이오와주다. 70년대 이후 중서부에 위치한 작은 주 아이오와에서 양당 공히 첫 번째 경선 승리자가 배출되는 역사는 여러 가지로 흥미롭다. 천문학적 액수를 쏟아부어야 하는 TV 선거 광고보다 커피숍과 브런치 식당 등에서 후보자들이 직접 유권자들을 만나는 소위 ‘소매 정치(retail politics)’가 필요한 곳이 바로 아이오와다. 따라서 대권에 관심 있는 정치인이라면 일찌감치 아이오와 방문 빈도를 높여 눈도장을 찍고 조직 관리에 공을 들여야 한다. 이는 높은 정치의식과 투철한 참여정신을 가진 아이오와 주민들이 코커스라고 불리는 당원 중심 후보 선출 방식을 고수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각 당의 당원들은 투표 당일 학교와 교회 등에 모여 각 후보들의 정책을 놓고 토론을 벌인다. 이후 마음을 정한 당원들이 후보 이름이 적힌 곳으로 줄을 서는 공개 투표 방식도 독특하다. 백인 유권자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과반수의 개신교도가 주로 농업에 종사한다.


트럼프 ‘잘 싸운 2등’만 해도 희망 공화당의 경우 여론조사에서 테드 크루즈(텍사스) 연방 상원의원이 트럼프 후보와 접전 중이고 그 뒤를 마코 루비오 상원의원 등이 따르고 있다. 전국 지지도에서 트럼프에 못 미치는 크루즈에게 아이오와에서의 1등은 대권 후보 가능성에 대한 긍정적 신호로 작용할 것이다. 공화당 주류 세력에게 자신이 실제 공화당 후보가 될 수도 있음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된다. 반면 턱걸이 2등 혹은 3등의 성적을 받는다면 다음 경선지 뉴햄프셔에서의 약세와 맞물려 캠페인의 동력을 급속도로 잃을 수 있다.


트럼프에게도 당연히 1등이 최선이겠지만 ‘잘 싸운 2등’만 해도 정치적 존재감을 인정받고 자신의 본거지인 뉴욕과 가까운 뉴햄프셔 프라이머리(9일)에서 상승세를 이어갈 수 있다. 반대로 3등 이하의 성적표를 받아 든다면 그동안의 트럼프 열풍은 마치 2004년 민주당의 하워드 딘 후보의 경우처럼 하룻밤 새 사그라들 가능성도 있다.


민주당의 힐러리는 어떨까. 만일 아이오와에서 샌더스와의 표 차이가 충분치 않다면 대의원 수를 나누어 가지도록 되어 있는 민주당 경선 룰을 고려할 때 적어도 3월 1일 수퍼 화요일까지 결과를 장담키 어려울지 모른다.


물론 아이오와에서의 승리가 최종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2008년 공화당의 아이오와 승자는 허커비 전 아칸소 주지사였고 2012년은 샌토럼 전 펜실베니아 연방 상원의원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공화당의 대선 후보가 되진 못했다.


미국 대선의 초반부에선 ‘막말하는 국수주의자’ 트럼프와 ‘미국판 경제민주화’를 외치는 노장 샌더스가 선전 중이다. 그러나 경쟁은 이제 시작이다. 젊은 흑인 대통령으로서 변화와 통합을 외쳤지만 불평등과 양극화를 결국 넘어서지 못한 오바마 이후의 시대를 앞두고 2월 1일 아이오와 주민들은 과연 누구에게 기선 제압의 특권을 부여할지 자못 궁금하다.


서정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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