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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박근혜 대통령의 부적절한 서명정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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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백악관 책상에 붙여 놨다는 글귀 ‘The Buck stops here’는 국정의 모든 책임이 최종적으로 자기 앞에서 멈춘다는 대통령직의 무한책임을 표현하고 있다. buck은 포커판에서 딜러를 나타내는 표식이었다고 한다. 대통령은 복잡다단하게 얽힌 상황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다. 대통령의 책임을 대신 맡아줄 그 어떤 자리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헌법과 법률에 따라 대통령에게 가장 많고 가장 강력한 권한이 주어진 이유는 대통령만이 국정의 현안을 마지막까지 책임지고 해결한다는 대통령중심제의 원리 때문일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국무회의에서 “지난주부터 대한상의 등 38개 경제·시민단체가 민생구하기 입법촉구 1000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저도 어제 길거리에서 서명을 했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길거리에서 국회를 압박하기 위한 시민단체의 서명운동에 참여하고 이를 국무회의 석상에서까지 언급한 건 부적절하고 어색하다. 국회의 입법 사보타주를 풀어야 한다는 대통령의 절박한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박 대통령의 서명정치는 자신에게 부여된 최종적 문제 해결의 책임을 남에게 돌린다는 인상을 줬다.

 국회를 겨냥한 입법청원, 입법압박은 일반 시민의 자연스러운 요구이자 정치과정의 출발점이다. 정치과정의 완성은 대통령·국회가 함께 해내야 할 몫이다. 대통령이 다루기 어렵다고 국회와 파트너십을 버리는 것처럼 비춰져 국민이 걱정하고 있다. 대통령이 정치의 해결점에 있지 않고 문제의 출발점에 서는 일은 의연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동안 더불어민주당 야당 세력이 국정 현안을 국회에서 풀지 않고 툭하면 길거리와 광장에서 시민단체들과 합세하는 무책임 정치를 비판해 왔다. 박 대통령의 서명정치도 그런 오해를 받을 수 있 다. 국무회의는 대통령의 의사결정을 보좌하는 자리다. 황교안 국무총리를 비롯해 어제 국무회의에 참석한 장관들 입에서 대통령 언행의 신중성을 주문하는 직언이 나오지 않은 건 유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