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문재인 사퇴, 친노 패권주의 청산 계기 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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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어제 신년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재창당 수준으로 당을 바꾸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선대위가 안정되는 대로 사퇴하겠다고 했다. 회견의 핵심 용어는 ‘변화와 사퇴’였다. 문 대표가 당을 변화시키겠다면서 당 대표직을 사퇴하겠다는 말은 일견 모순적이다. 당을 변화시키려면 권한이 있어야 하는데 당 대표를 내려놓으면서 어떻게 변화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든다. 그래서 친노(親盧)나 친문(親文) 인사라고 볼 수 없는 일부 당 소속 의원도 문 대표의 사퇴로 당이 더 무질서해지고 더 큰 혼란으로 빠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야당 정치를 넘어서 한국 정치라는 더 큰 틀에서 보면 문 대표의 사퇴는 늦었지만 잘된 일이다.

 문 대표는 본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이른바 친노 패권주의 세력의 중심에 있었다. 친노 패권세력은 정치를 끝없이 선과 악, 아군과 적군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 진영논리를 바탕으로 국가적 정의보다 분파적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국민에게 투영돼 왔다. 이들이 제1야당의 주류로 등장한 지난 5년간의 적폐가 결국 안철수의 탈당과 야권 분열이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졌다. 문 대표가 자신의 임기 마지막 작업으로 친노 패권 문화를 수술하겠다는 김종인 선대위원장을 영입한 것도 이 문제를 해결해야 변화의 돌파구가 가능하다는 인식에 도달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 대표의 회견은 일단 더민주를 살리기 위한 살신성인의 자세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문 대표는 종종 언행의 불일치와 메시지의 혼선을 일으키곤 했다. 회견에서 밝힌 대로 당권에서 깨끗하게 손을 떼고 새로운 지도부에 간섭하지 않는 인내를 끝까지 발휘해야 한다. 문 대표 주변의 친노 패권 세력들로 지목된 이들도 행여 새 지도부를 나무에 올려놓고 흔들려는 시도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문 대표는 그동안 운동권·시민단체 출신 대신 신선한 실용적 전문가들을 영입해왔다. 이런 것이 진정한 변화로 이어지려면 공천과 선거 운용에서 친노 세력은 뒤로 물러나야 한다. 문 대표는 선대위에 전권을 주겠다고 했다. 이 약속이 어느 정도나 지켜질지 유권자는 지켜볼 것이다.

 야당 대표로서 문 대표의 대정부 비판은 매우 날이 서 있다. 아무리 선거를 앞두고 있다 해도 일부 대목은 부적절했다. 그는 “대통령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팔아 넘겼다. 우리는 위안부 협상을 원점으로 돌릴 것이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대통령과 일본의 총리가 수년간 끌어온 외교 협상에 일부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더라도 이런 식의 감정적인 표현을 한 건 옳지 않다. 외교는 상대가 있는 게임이라는 걸 참여정부의 대통령비서실장까지 지낸 사람이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이 말은 자신이 집권하면 한·일 정부 간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겠다는 입장인데 이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4년 전 대선 때 문재인 후보 측이 “우리가 집권하면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폐기하겠다”고 한 것과 비슷하다. 협상이 미흡한 것과 정부 합의를 파기하는 건 다른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