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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畵壇에 독일이 몰려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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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한국 미술계는 독일 현대미술을 공부하려고 마음먹은 듯 보인다. 1990년 통독 이후 국제미술계에 떠오른 독일 작가들의 작품전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 5~6월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선보였던 '독일 현대미술 3인전'을 시작으로 '게르하르트 리히터전','독일 현대미술전','볼프강 라이프전' 등이 각 지역 미술관에서 막을 올린다. 상반기 여러 기획전에 묶여 나온 독일 사진가들과 설치작가들을 더하면 10여명의 독일 미술인들을 접하는 셈이다.

이런 독일 현대미술 바람은 독일 국제교류처(ifa)가 꾸린 세계 순회전이 겹친 까닭도 있지만 구상과 추상, 회화와 사진, 전통과 새로움을 넘나들며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끈질기게 파고든 독일 작가들의 힘에서 왔다.

그 정점에 게르하르트 리히터(71)가 있다. 2일부터 31일까지 서울 통의동 대림미술관에서 열리는 '사진과 그림 사이에서, 게르하르트 리히터-조망'은 작가 자신이 고른 대표작 27점으로 이뤄진 회고전으로 그가 지금 '유럽의 가장 위대한 현대화가' 로 꼽히는 내력을 읽게 한다.

리히터는 옛 동독 태생으로 1961년에 서독으로 넘어와 이데올로기의 벽을 뛰어넘었고. 미술사 내부에서 일종의 모순으로 내세운 각종 사조와 장르의 편견을 걷어내고 '미술이 오늘날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집중했다. '다양성'과 '변화의 경향'이 그의 작품세계를 요약한다.

91년작 '베티'는 리히터가 딸의 뒷모습을 담은 사진이지만 세 겹의 벽을 통과한 작품이다. 78년에 찍은 딸의 사진을 10년 뒤인 88년에 구상 회화로 그렸고, 그 그림을 다시 3년 뒤에 찍었다.

금발 머리카락 위에 쏟아지는 빛과 붉은 색 옷 무늬의 화려함이 검은 배경 위로 섬세하게 드러나 있다. 초점이 흐려진 부분은 작가의 의도로 새 표현효과를 낳는다. 그림과 사진은 다르고, 각각의 몫이 있다는 것을 그는 보여준다.

굳어진 양식을 '폭력행위'라 거부하고 매체와 방법을 바꿔가며 색다른 방식으로 계속 진화하는 리히터는 동.서독의 대립을 딛고 선 통일독일의 상징처럼 보인다.

"모든 그림에서 내가 추구하는 것은 공통점이 없고 대립적인 요소들을 가장 위대하고 적절한 자유 안에서 생생하고 확실하게 화해시키는 것"이라는 그의 말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찾는 한 예술가의 고백으로 들린다. 02-720-0667.

27일까지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독일현대미술전'은 60대부터 30대까지 6명 독일 현역 작가들 작품을 모아 독일 미술의 한 단면을 살피는 기회를 준다.

언어와 드로잉과 조각을 엉뚱하게 조합해 책처럼 만든 프리츠 슈베글러, 집 구석구석을 재건축해 관람객을 독특한 체험에 빠뜨리는 그레고르 슈나이더, 정치적 억압을 주제로 택한 비디오 아티스트 마르셀 오덴바흐 등의 근작이 통독 이후 독일 미술의 부흥을 말해주고 있다. 051-740-4241.

이밖에 9일부터 9월 12일까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지난 3~5월 호암갤러리에서 열렸던 '마인드 스페이스'전에 밀랍을 이용한 명상적인 작품을 선보여 인상깊었던 볼프강 라이프(52)의 개인전이 이어진다. 꽃가루.우유.돌 등 자연에서 얻은 천연 재료를 써 유토피아의 정신세계를 꿈꾼 라이프의 70년대부터 최근작까지 50여점이 나온다. 02-2188-6038.

정재숙 기자

<사진 설명 전문>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1991년에 발표한 ‘베티’. 딸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10년 뒤 그리고, 3년 뒤 그 그림을 사진으로 다시 찍어 사진과 회화는 다른 표현 방식임을 섬세하고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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