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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덱스 43년, 홀푸드 38년 … CEO 유효기간 늘린 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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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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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종전 처리 논의가 한창이던 1945년 3월. 미국 조지아주에 있는 백악관 별장에 의료진이 황급히 몰려들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극심한 두통을 호소하다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미국 전역엔 갑작스러운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사람들은 그를 하반신 마비를 뚫고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4선에 성공해 무려 12년간 백악관을 지킨 대통령이자, 경제 대공황을 이겨낸 경제 리더로 추앙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47년 3월. 대통령의 임기를 중임으로 제한하는 수정헌법 22조가 발의된다. “루스벨트와 같은 선례가 없도록 권력의 장기 집권을 막자”는 취지였다.

[똑똑한 금요일] 장수한 최고경영자의 조건

 기업의 최상위 권력자인 최고경영자(CEO)의 적정 임기는 얼마일까. 루스벨트를 끝으로 권력의 초장기 집권을 막은 미국 사회의 이야기처럼 CEO의 임기는 계륵(鷄肋) 같은 존재였다. 그 어떤 기업도 한 경영자가 최대 몇 년을 재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두지 않고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최근 미국 기업들의 트렌드는 ‘정답 없는’ 경영자의 임기에 대해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바로 늘어나고 있는 장수(長壽) 경영자들이다.

 미국 경제전문매체인 CNN머니는 최근 ‘투자의 귀재’인 워런 버핏(86)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의 후예로 꼽힐 만한 장수(長壽) 경영자들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임원들의 보수 조사 전문업체인 에퀼라(Equilar)에 따르면 미국 상장회사 CEO의 평균 재임 기간은 10년 전(5년)보다 1년 증가한 6년으로 집계됐다. 우량회사를 상징하는 S&P 500지수에 포함된 회사를 기준으로 보면 이 추세는 더욱 도드라졌다. 2005년만 하더라도 10년 이상 회사를 운영하는 CEO는 94명에 그쳤다. 하지만 10년 뒤인 2015년엔 이 수치가 141명으로 치솟았다. 이 같은 추세는 창업형 경영자들에게서 더욱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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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 경영자의 대표주자인 버핏은 올해로 46년째 버크셔해서웨이를 이끌고 있다. 버핏의 기록을 앞서가는 경영자도 있다. 속옷 브랜드인 빅토리아 시크릿을 보유한 엘브랜즈의 레슬리 웩스너(79) 회장과 ‘글로벌 미디어의 황제’ 루퍼트 머독(85) 뉴스코퍼레이션 회장이다. 63년 미국 오하이오주에 여성복 전문점인 리미티드를 차렸던 웩스너 회장은 올해로 경영 53년째를 맞이했다. 루퍼트 머독 회장은 이보다도 긴 64년의 기록을 세우고 있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을 경영자 자리에서 보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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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 유기농 식품 홀푸드 존 매키(63) CEO는 38년째 경영일선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2007년 인수하려고 마음먹었던 회사를 비방하는 댓글을 무려 8년간 올린 혐의로 ‘최악의 경영자’란 소리를 들으며 체면을 구겼다. 하지만 긴 세월이 지나며 댓글 공작 망신은 잊혔다. 창업형 장수 CEO 중에선 우리의 삶을 크게 바꿔놓은 사람도 있다. 페덱스의 창업주이자 회장인 프레드 스미스(72)다. 그는 예일대 재학 시절 ‘물류 집결’을 통한 배송시스템을 고안했다. 내용을 리포트로 써냈지만 “불가능한 방식”이란 이유로 혹평을 받았다. 졸업 후 27세가 되던 해 그는 테네시주 멤피스에 회사를 세웠다. “꼭 필요한 화물은 야간에도 배달한다”는 원칙을 만들며 그는 ‘익일배송’ 시스템을 추진했다. 페덱스는 그렇게 물류사업을 혁신하면서 세계 3위의 항공운송업체로 성장했다. 장수하는 경영자들이 늘면서 CEO들의 평균연령도 상승했다. 기업 컨설팅 전문업체인 스펜서 스튜어트의 조사가 이를 뒷받침한다. S&P 500지수에 포함된 기업 경영자들의 평균 나이는 2014년 기준 56.9세였다. 이는 2004년 55.3세와 비교해 3%나 증가한 수치였다.

 놀라운 변화다. CEO 재임 기간은 최근까지 줄어드는 추세였다. 레너드 세일즈 전 MIT대 경영학과 교수는 『CEO의 두 얼굴』에서 “경영자 평가가 주가 상승을 기준으로 이뤄지면서 CEO가 파리 목숨이 됐다”고 지적했다. 더욱이 1년 이내 단기의 주가 상승률을 바탕으로 CEO의 성적이 매겨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요즘 장수 경영자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최근 추세를 ‘기업의 생존 본능’으로 설명했다. 배상근 한경연 부원장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일어난 2008년을 기점으로 설명했다. 그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시기는 ‘대안정기(Great Moderation)’로 저물가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경제 성장에 힘입어 기업들 역시 안정적 성장을 구가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리먼 사태를 기점으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시장은 역전됐다. 세계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저성장의 시대가 도래했다. 배 부원장은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기업들은 경영진을 교체하기보다는 안정적으로 위기를 타개하자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창업주이면서 장수하는 경영자들에겐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획기적인 혁신제품이나 사업을 앞세워 글로벌 시장을 무대로 사업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배 부원장은 “구글과 페이스북, 유니클로처럼 시야를 한 국가의 시장에만 국한하지 않고 전 세계 시장을 보고 사업을 추진하는 경영자들은 해당 제품 수명이 다할 때까지 시장 선점의 과실을 누릴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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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EO 단명 시대에도 예외적인 기업은 존재했다. 바로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GE)이다. 세계 최우량 기업 중 하나로 꼽히는 GE의 CEO는 제프리 이멀트(60)다. GE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끌었던 잭 웰치(81·20년 경영) 전 회장에 이어 2001년 바통을 넘겨받은 그는 올해로 16년째 GE의 경영을 맡고 있다.

 경영전문지인 비즈니스인사이더는 “이멀트를 주가 상승률만으로 평가한다면 그는 GE 내에서 가장 먼저 가방을 싸야 할 사람”이라고 최근 보도했다. 그의 CEO 선임 이후 GE 주가는 거의 오르지 않았다. GE 주주와 이사회가 다른 기준으로 CEO를 평가한다는 방증이다. 실제 이멀트는 ‘GE 르네상스(제조 부문 부활)’의 주인공이다. 그가 CEO에 취임할 당시만 해도 금융과 제조업이 GE의 성장의 축이었다. 하지만 그는 과감히 체질 개선을 선택했다. 2014년 가전사업 매각에 이어 지난해 5월엔 아예 금융사업 정리계획을 발표했다. 대신 2500억 달러(약 300조원)를 디지털 산업에 기반한 제조업에 투자하겠다는 비전을 내놨다. 그가 주도하는 변화에 주가는 지난 한 해 20%가량 상승하며 화답했다. 투자은행 윌리엄블레어마저 GE에 대해 “2022년까지 주가가 두 배 상승할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장수 CEO 증가는 역사적 회귀이기도 하다. 세일즈 전 MIT대 교수는 “80년대 이전까지 CEO는 제사장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가뭄이나 흉년의 책임을 지고 참수된 원시시대 제사장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세일즈는 “당시 주주와 이사회는 실적 개선을 CEO만의 일로 보지 않았다”며 “회사 조직원 전체가 노력한 결과로 생각해 순이익이 늘었다고 CEO 연봉을 획기적으로 늘려주거나 줄었다고 곧바로 책임을 물어 CEO를 해고하지 않았다”고 했다.

 역사 회귀라고 해서 ‘CEO 회색인간 시대’가 부활할 것 같지는 않다. 미 금융역사가인 존 스틸 고든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CEO는 개성이 거의 없는 (회색) 인물로 비쳤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주주총회와 이사회 결정을 충실히 이행하는 대표 일꾼일 뿐이었다. CEO가 이런 인물이 되기엔 요즘 글로벌 시장 환경이 녹록지 않다. 생존의 무게가 70여 년 전과 질적으로 다르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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