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무함마드 적통” 수니·시아파 1400년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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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갈등은 이슬람 대표 종파인 수니파와 시아파의 오랜 구원(舊怨)에서 비롯됐다. 이슬람교 전체의 85%가량을 차지하는 수니파와 소수파인 시아파의 갈등은 14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632년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이슬람 세력은 분열됐다. 수니파는 공동체 합의로 칼리프(정치·종교 지도자) 선출을 주장했으나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친·인척만 칼리프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수니파 뜻대로 선출된 1~3대 칼리프들은 병으로 죽거나 암살당했다. 시아파가 적통이라고 주장한 알리는 4대 칼리프가 됐지만 수니파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의 차남 후세인과 그 가족들도 이라크 카르발라에서 피살되며 수니파와 시아파는 원수 사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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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니파는 이후 칼리프제를 이어가며 정복 활동을 벌였다. 동유럽과 중앙·동남아시아, 북아프리카까지 영향력을 넓혀 오늘날의 이슬람 영역을 확립했다. 칼리프 국가는 1922년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멸망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18세기부터 아라비아반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우드 가문이 3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건국하고 이슬람 성지 메카·메디나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사우디는 수니파의 맹주가 됐다.

사우디·이란, 88년부터 3년간 단교 전력

 칼리프를 부정하고 알리와 후손들을 추종한 시아파는 이라크 지역에 정착했다. 이란은 수니파가 우세한 나라였지만 오스만 제국과의 갈등으로 1500년께 시아파로 종파를 바꿨다. 이란은 79년 혁명 이후 시아파의 맹주를 자처한다. 사우디와 이란은 80년대 이후 반목을 거듭했다. 이란 혁명을 이끈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사우디의 건국 이념인 와하비즘을 이단이라고 비난해 88년부터 3년간 외교 관계가 단절되기도 했다.

이기준 기자 lee.kijun@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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