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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시아파 성직자 처형…중동 주도권 다툼 재연

중앙일보

입력

중동 분쟁의 밑바닥엔 종파 갈등이 있다. 크고 작은 수니·시아파 간 충돌이 있어왔다. 사우디아라비아가 2일(현지시간) 테러리스트라며 47명을 집단 처형한 것은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사우디 내에서 반정부 목소리를 내온 50대 중반의 시아파 성직자 님르 바크르 알님르가 포함돼서다.

사우디 법원은 2011년 ‘아랍의 봄’ 때 알님르가 시아파의 반정부·민주화 시위를 주도했고 이 과정에서 불순한 외부세력을 끌어들여 왕권에 불복종하고 공권력을 공격했다고 판단해 2014년 사형을 선고했다.

알님르의 사면을 요구해 왔던 시아파 국가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시아파 맹주인 이란의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는 "탄압받았던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다. 신의 분노가 사우디 정치인들에게 내려질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란 외무부도 "사우디가 테러리스트와 극단주의자를 지원하면서도 국내에선 압제와 처형으로 비판 세력에 대응한다. 이런 정책은 큰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라크의 시아파 정파에서도 "바그다드 주재 사우디 대사관을 즉시 폐쇄하고 대사를 추방하라"는 요구가 나왔다. 사우디는 지난달 15일 바그다드에 대사관을 25년 만에 다시 열었다.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세력 헤즈볼라는 "암살"이라고 규정했다.
이들 국가에선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이란의 테헤란에 있는 사우디 대사관이 공격을 받아 화염에 휩싸였다. 수십 명의 시위대는 "(사우디 왕가인) 알사우드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쳤다. 이란의 제2도시 마슈하드의 사우디 총영사관에도 돌이 날아들었다. 사우디 국기가 찢기기도 했다. 바레인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국제사회는 우려했다. 사우디의 집단 처형을 비판하면서도 시아파 국가들엔 자제를 요청했다. 존 커비 미 국무부 대변인은 "사우디 정부는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해 달라. (이번 처형이) 종파적 긴장을 악화시키는 위험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양측 간 갈등이 더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두 나라는 이미 시리아·예멘 내전의 해법을 두고 갈등해 왔다. 이란은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진영과 예멘의 후티 반군을, 사우디는 시리아 반군과 예멘 정부군을 지원해 왔다. 이라크 내 종파 갈등의 배후에도 이들이 있다.

사우디 정부는 알님르의 처형을 두고 "그간 미룬 형 집행을 한 것뿐"이라고 말한다. 처형자의 대부분은 수십 년 전 사형 선고를 받은 알카에다 대원들이다. 사우디 내에선 반기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시아파 국가들은 물론 서구에서도 ‘정치적 처형’이란 견해가 있다. 알님르가 공개적으로 반체제 활동을 한 게 사우디의 안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알님르는 사우디 왕가를 조롱하기도 했다. 2012년 내무 장관이던 나예프 빈 압둘아지즈 왕자를 향해 "벌레에 먹혀 죽을 것이고 무덤 속에서도 지옥의 고통을 맛볼 것"이라고 했는데 그의 아들인 무함마드 빈 나예프가 왕세자이자 내무장관이다. 근래 유가 급락에다 예멘 내전 장기화로 왕가가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시아파를 이끌면서 수니파와 평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그가 사우디 정부로선 가시와 같았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수니파·시아파=수니파는 신의 말씀인 코란과 함께 예언자 마호메트의 언행과 관행을 의미하는 수나(Sunnah)를 따른다. 전체 무슬림의 85%에 달한다. 시아파는 예언자 마호메트의 적통 계승이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제4대 칼리프)에게 있다고 보고 알리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계자들만 이맘(종교지도자)으로 받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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