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해, 희망의 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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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0호 31면

새해 아침 한 가난한 동네에 있는 성당을 찾았다. 지방 도시의 변두리 구역이었다. 신부님이 강론을 하다 신자들에게 내려와 차례차례 ‘올해 무슨 꿈을 꾸었느냐’고 물었다. 가족이 아프지 않았으면…, 일을 할 수 있었으면…, 배추가 잘 자라 나눠먹을 수 있었으면…. 소원을 듣는 내 가슴이 먹먹했다. 신부님은 올해는 정부지원금으로 낡은 성당 외벽에 그림을 그려 넣어 꾸밀 수 있게 됐다고 좋아했다.


꿈은 멀리 있지 않았다. 추상적인 것도, 거대한 것도 아니었다. 먹고 사는 것…. 내 가족과 가까운 이웃이 함께 웃을 수 있었으면 하는 희망이었다. 분노는 그 소박한 소망이 무너질 때 생긴다. 희망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갈 힘이다. 당신은 올해 무슨 꿈을 꾸었는가.


돌아보면 참 답답했다. 젊은이들은 ‘헬조선’이라는 말로 조롱했다. 일을 해야 먹을 게 아닌가. 꿈으로 가득 차야 할 청춘. 그런데 구명조끼도 없이 널빤지 하나 찾을 수 없는 넓은 바다에 뛰어들어야 하는 처지라니. 통계청 발표로는 청년실업률이 나아졌다. 지난 10월 7.4%로 2년 5개월 만에 최저라고 한다. 그런데 왜 아우성이었을까. 아르바이트까지 취업자로 집어넣었다. 취업준비생이 63만7000명으로 1년 전보다 14.7%가 늘었다. 구직을 단념한 사람도 53만9000명이다. 숫자는 몸으로 느끼는 것과 너무 먼 곳에 있다.


배가 고파도 함께 위로하면 견딜 수 있다. 하지만 혼자 배를 채우는 사람이 있다면 참기 힘들다. 더군다나 영화 ‘베테랑’의 조태오(유아인)처럼 ‘어이가 없는’ 놈들이 ‘흙수저’를 짓밟는 모습을 너무 자주 보았다. 지니계수는 0에서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하다. 0.4를 넘으면 심각한 수준이다. 그런데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발표로는 2014년 가계 단위 가처분소득 지니계수가 0.4259다. 순자산 지니계수는 더 심해 0.6014나 된다.


가진 것만 다른 게 아니다. 가진 것이 경쟁까지 왜곡했다. 재벌 2·3세뿐 아니다. 로스쿨 시험에 고위층 부모가 개입하고, 대형 로펌들이 고위층·부유층 자제들을 많이 뽑는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또 한번 ‘흙수저’들은 좌절감을 맛봤다. 특권층만 그런 게 아니었다. 연예인들은 방송에 자녀들을 데려 나와 데뷔시키고, 대형 노조는 자녀들을 특별채용하라 요구하고….


우수한 인재들이 의대로, 로스쿨로 몰렸다. 도전보다 안정이 대세였다. 시베리아 같은 취업 환경, 불안한 노후 보장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다. 개인적인 선택이야 그렇다 쳐도 나라의 미래는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젊은이들에게 창업이 미래라고 이야기한다. 도전하라고 한다. 말이 아니라 그럴 수 있는 환경부터 다져줘야 한다.


외부 환경은 더 매섭다. ‘대륙의 실력’을 ‘대륙의 실수’로 착각한 것은 자만이었다. 상표만 떼면 샤오미의 실력이 삼성 턱밑에 왔다. 현대차 한 대를 만드는데 미국 공장은 15.4시간, 중국 공장은 18.8시간, 국내 공장은 30.5시간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도 시간당 임금은 한국이 미국보다 높다. 이 상태로 얼마를 더 버틸까.


지난해는 ‘분노’의 해였다. 절망과 분노는 영화의 옷을 입고 얼굴을 드러냈다. 대중의 숨은 감정은 열광적인 흥행기록으로 표출됐다. ‘내부자들’, ‘베테랑’, ‘부당거래’…. 잘못된 구조를 만들어온 기득권층을 조롱하고 응징했다. 세밀한 묘사에 잘못이 있고, 과장됐다 해도 문제가 아니다. 그런다고 대중의 분노를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분노가 우리 사회를 채우고 있다. 세월호, 위안부, 그 어떤 일도 이 분노를 삭이지 않고는 갈등을 피하기 어렵다. 기득권 세력에 대한 불신과 억울한 심정이 가득하다. 이것을 푸는 건 힘 있고, 가진 사람들의 책임이다.


영화 ‘스타워즈’를 보면 선과 악이 교차한다. 에피소드1에 나오는 노예소년 아나킨이 선의 아이콘으로 보인다. 그런데 악의 중심인 ‘다스베이더’로 변한다. 경계를 가르는 것은 ‘분노’다. 분노가 사랑을 증오와 학살로 끌고 간다. 모든 사람에게 ‘제다이’처럼 개인 수련으로 분노를 극복하라고 주문할 수는 없다. 분노를 느낄 환경을 만들어 놓고, 분노하는 사람만 처벌할 수도 없다.


분노할 요인을 없애주는 게 정치가 할 몫이다. 그러지 못하면 그 공동체는 뒤집어지고, 깨어진다. 2012년 대통령선거 때 복지가 최고의 화두가 됐던 것도 이 ‘분노’의 파도를 예상했던 것이 아닌가. 새해 아침, 서민들의 소박한 꿈이 짓밟히지 않고, 사회적 분노가 가라앉는 그런 꿈을 꾼다.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jink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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