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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면 돕는 앱·코디 쓰는 젊은층 “귀지 파주는 소리 들어야 잠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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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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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터 배민호]

취업준비생 김지혜(26·여)씨는 최근 4개월간 잠을 개운하게 자 본 적이 없다. 방송사 취업을 목표로 하고 있는 김씨는 최근 입사 지원을 했지만 번번이 서류 전형에서 미끄러지면서 자신감도 많이 떨어졌다. 침대에 누워도 취업 걱정과 함께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라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새벽 4시를 넘겨 겨우 눈을 붙여도 몇 번씩 깨어나며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김씨는 “잠을 자고 싶어 일부러 혼자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취업을 못하면 친구와 애인, 가족에게 당당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이 계속 따라다니는 느낌”이라며 “잠을 못 자니 몸도 상하고 마음도 함께 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뉴스 속으로] 2030 수면장애 환자 늘어
20~30대 불면증 환자 7만여 명
“취업 스트레스·긴장감 때문에 발생
시험 앞두고 찾아오는 학생 많아”

 대학 졸업반인 최우주(24·여)씨는 취업과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일주일에 사나흘은 잠을 자지 못하고 밤을 지새우고 있다. 잠을 못 자고 학교에 가면 수업 시간에 멍한 상태로 있거나 꾸벅꾸벅 졸았다.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했지만 불면증은 반년간 이어졌다. 수면베개, 수면안대 등 잠을 돕는 물품을 사서 사용해봤지만 효과는 없었다. 최씨는 “지금까지 이런 피곤함이 병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증상이 오래 지속돼 병원에 가보려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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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 못 드는 청춘’이 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에 따르면 국내 수면장애 환자 41만4524명(2014년 기준) 중 20·30대가 7만 2810명(17.6%)에 달한다. 2012년 2만1935명이었던 20대 수면장애 환자는 2013년 2만3268명, 2014년 2만4074명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30대 수면 장애환자 역시 2012년 4만1306명, 2013년 4만4988명, 2014년 4만7736명으로 불어났다.

 전문가들은 취업시장 불안과 실업률 증가, 처음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젊은 직장인들의 경쟁 심화 등을 20·30대 수면장애의 주 원인으로 꼽는다. 한국수면학회의 2013년 연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젊은 층은 미래가 불투명할 경우 수면장애를 호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트레스로 가중되는 불안함과 우울감·압박감 등의 감정이 잠을 깨우는 기능을 가진 호르몬 ‘코티졸’ 분비를 촉진해 수면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한진규 서울수면센터 원장은 “불면증은 스트레스에 노출된 환경과 일상 생활에서의 긴장에 의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공무원 시험 등 취업 시험을 앞두고 수면장애를 호소하며 찾아오는 학생이 최근 많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 잠재워 주는 코디네이터까지 등장 = 젊은 층의 수면장애가 늘다 보니 숙면을 돕는다는 다양한 방법이 등장하고 있다. 최근 20·30대에게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건 ASMR(자율감각쾌락반응)이다. ASMR은 귀지 파주는 소리, 머리 자르는 소리, 장작 타는 소리 등 개인이 기분 좋게 느끼는 소리를 영상으로 재현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고르고 영상을 클릭하면 화면과 소리가 뜨고 이어폰 등을 통해 시청할 수 있다. 편안한 상태에서 숙면을 취할 수 있다고 입소문을 타면서 이용자들이 크게 늘었다. 세계적으로 약 21만 건의 ASMR 영상이 업로드돼 있고 이 중 한국에서 제작된 영상이 6만 건이 넘는다. 소리를 전문적으로 만들어내는 사람을 일컫는 ‘ASMR 아티스트’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다.

 유튜브 조회수 170만을 넘긴 한 ASMR 영상을 보니 귀이개를 든 여성이 등장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귀지 파는 소리를 들려줬다. 사람이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모닥불에서 장작이 타닥타닥 타 들어가는 장면과 소리를 반복적으로 들려주는 영상도 있었다.

 ‘영상을 볼 때마다 기분 좋은 느낌이 들고 편안해져 잠이 잘 온다’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좋아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오랜만에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등의 댓글이 줄지어 달렸다. 인기 ASMR 영상을 만든 유민정(27)씨는 “제 영상을 보고 불면증이 개선됐다거나 잠을 잘 자 스트레스가 해소됐다는 댓글들을 보면 뿌듯하다. 영상 광고수입도 꾸준히 증가할 만큼 방송을 찾는 이도 많고 실시간 조회수도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불면증이 시작된 이후 ASMR 영상을 즐겨 듣는다는 대학생 서모(23)씨는 “숙면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잠자리에 들 때 불안하고 떨리는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아 매일 밤 듣고 있다”고 말했다.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한 숙면과 관련된 용품들의 매출도 급증하고 있다. 올해 11번가의 전체 숙면용품 매출액 중 20·30대의 구매 비율은 66%(지난해 58%)에 달한다. 이들이 구매한 숙면용품의 매출도 지난해 대비 40% 느는 등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다. 업체 관계자는 “밴드가 턱을 잡아당겨 입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고 코로 하는 호흡을 유도해 숙면을 돕는 ‘입 벌림 방지밴드’, 코 안에 스프레이를 직접 분사해 코골이 증상을 완화시켜 숙면에 도움을 주는 ‘코골이 스프레이’, 침구 전용 향수나 무중력 의자 같은 숙면용품을 찾는 고객은 대부분 젊은이다”고 말했다.

 수면 관련 용품 외에도 숙면을 돕는 직업도 등장했다. ‘수면 코디네이터’는 잠과 관련된 컨설턴트를 진행하고 결과를 바탕으로 고객에게 맞춤형 수면용품과 자세 등을 제안하는 일을 한다. 경추와 체압 등을 측정하고 체형 등을 고려해 베개와 이부자리를 개인별로 제작해 주는 식이다. 지난 10월 영업을 시작한 ‘슬립앤슬립’ 코엑스점 관계자는 “고객의 60%가 30대 이하일 정도로 젊은 층의 숙면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 취업준비생뿐 아니라 사회생활을 하면서 압박감을 받는 젊은 직장인들도 상담을 많이 하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의학적으로 완전히 검증되지 않은 일부 수면용품이나 ASMR에 지나치게 의존할 경우 오히려 부작용을 얻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과거 ASMR을 매일 3개월간 듣고 잤다는 김지민(23)씨는 “좋아하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 아예 잠을 이루지 못할 수준에 이를 정도로 중독 증상이 생겼다. 침대에 눕자마자 이어폰부터 찾게 되는 생활이 반복되면서 최근엔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 듣는 식으로 횟수를 줄여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직장인 A씨(33)는 불면증을 고치기 위해 매번 안대를 하고 잠을 청하다가 안대를 해야만 뇌에서 수면호르몬이 분비되는 이상 증세가 발생해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기도 했다. 수면센터 한진규 원장은 “자기 전에 특정한 행동이나 용품에 의지해야만 잠을 잘 수 있는 ‘수면 개시 장애’ 증상이 젊은 층 사이에서 만연할 위험이 있다. 수면 유도 애플리케이션(앱)이나 용품들은 가끔씩 수면을 보조하는 정도로 사용하는 건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지나치게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건강이나 숙면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손국희 기자, 최수연 예비기자 9key@joongang.co.kr

[S BOX]  잠 재워주는 앱, 자주 쓰면 숙면 방해할 수도

만성적인 수면 장애를 해소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불면증이 지속될 경우 검증되지 않은 수단을 활용해 억지로 잠을 청하면 역효과가 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전문의와의 상담을 통해 생활 습관과 수면 장애를 유발하는 심리적·환경적 요인들을 천천히 제거해 나가면서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박주언 계요병원 정신과 전문의는 “수면을 돕는다는 비전문가의 영상이나 용품을 반복적으로 사용할 경우 신체 리듬이 반복된 자극에 익숙해져 더욱 강한 자극을 원하는 악순환에 놓일 수 있다”며 “ASMR이나 숙면용품도 일종의 외부 자극이기 때문에 이런 외부 자극들을 서서히 줄여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일정한 시간을 정해 일어나고 피곤한 느낌이 든다고 해서 장시간 낮잠을 자지 않는 등 생활 습관을 바꾸는 것이 우선”이라고 조언했다. 송신경 정신과의원 원장은 “ASMR 영상과 각종 시청각 애플리케이션에서 나오는 빛이나 소리가 실제론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수면 장애가 발생할 경우 주저하지 말고 병원을 방문해 수면위생교육, 긴장이완 요법 같은 의학적 치료를 받아야 증상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나미 심리연구원장은 “각종 용품을 이용해 일시적인 편안함을 찾기보다는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해 스트레스나 정신적 압박감을 주는 요인을 분석하고 개선해 나가는 게 숙면의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손국희 기자, 강지민 대학생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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