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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의 스포츠 스타는 누구…응답하라 198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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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추억을 먹고 산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tvN, 이하 응팔)'가 사람들의 눈과 귀를 끌어당기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1988년,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스포츠 스타들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응팔 1회에서는 주인공 성덕선(이혜리 분)이 서울 올림픽 피켓걸로 활동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당시 한국 선수단에서 가장 화제가 된 이는 김수녕(42)이었다. '바가지 머리'를 한 17세 궁사 김수녕은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한국 선수가 올림픽에서 2관왕에 오른 건 그가 처음이었다.

중앙일보 1988년 10월 1일자 기사는 '김수녕의 최대강점은 강인한 승부근성이다. 그는 다른 선수에게 1위 자리를 내주게 되면 저녁 내내 눈물을 흘릴 정도로 악바리 근성을 지녔다' 고 전했다. 김수녕은 1992년 바르셀로나와 2000년 시드니 대회에서 단체전 금메달을 따내 올림픽에서만 4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김수녕 대한양궁협회 이사는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에 머물고 있다. 지난 2014년 사우디 왕가가 한국 대사관을 통해 압둘라 빈 압둘라지즈 국왕(올해 1월 사망)의 외손녀들을 가르칠 지도자를 추천해달라고 요청했고, 김수녕 이사가 최종 낙점을 받았다. 김 이사는 연봉 20만 달러의 파격적인 대우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이사는 "사우디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덕선이의 골목 친구 '도룡뇽' 류동룡(이동휘 분)은 프로야구단 MBC 청룡 점퍼를 즐겨입는다. 당시 청룡의 성적은 보잘 것 없었다. 전기리그에선 7개 구단 중 꼴찌(17승2무35패), 후기리그는 5위(23승2무29패)에 그쳤다. 1988시즌의 주인공은 해태였다. 해태는 전·후기리그를 모두 제패한 뒤 한국시리즈에서도 우승하며 '해태 왕조'를 열었다. 중심에는 4번타자 김성한(57)이 있었다. 김성한은 홈런·타점·장타율·승리타점(88년까지 시상) 4관왕과 함께 사상 첫 30홈런 고지까지 밟아 최우수선수(MVP)상을 받았다. 전남 나주에서 독립구단 창설을 준비하고 있는 김성한 전 KIA 감독은 "내 선수생활의 절정기였다. 그 때는 연봉상한선(25%)이 있었다. 당시 7800만원의 연봉을 받았다"고 말했다. 사단법인 한국물가정보가 발간한 물가총람에 따르면 당시 라면 1개는 100원, 버스 요금은 140원, 소주 1병은 250원이었다. 현재 9억~10억원선인 은마아파트(76㎡) 시세는 5000만원이었다.

프로축구에서는 사상 초유의 MVP 수상 거절 사태가 일어났다. 11월 12일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운동장에서 유공-포항제철, 럭키금성-대우의 시즌 최종전이 열렸다. 별도의 시상식이 없던 당시에는 경기 뒤 곧바로 수상자를 선정해 시상했고, MVP로는 우승팀 포철 수비수 박경훈(54)이 뽑혔다. 하지만 박경훈은 운동장 주차장에 세워진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버텼다. 올림픽 대표팀에 차출돼서 절반(24경기 중 12경기) 밖에 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제주 감독직에서 물러난 박경훈 전주대 교수는 "지금처럼 기자단 투표가 아니라 선발위원회가 선정했다. 국가대표이자 팀의 간판이라는 점을 높게 평가한 것 같다. 하지만 후배 이기근(현 횡성FC 감독)이 득점왕에 올랐는데 내가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느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응팔' 에서 다정한 성동일(성동일 분)-성노을(최성원 분) 부자를 갈라놓은 건 농구대잔치였다. "이번 게임은 무조건 기아산업이 이겨부러. 강정수·유재학·정덕화, 이 셋이 모이면 완전 천하무적이랑게." "삼성전자가 이길걸. 김진·김현준,·오세웅, 완전 빵빵해." "아빠가 깜빡해부렀다. 신인 특급 선수 허재가 있자네."
 1983년 출범한 농구대잔치는 '슛쟁이' 이충희와 '전자슈터' 김현준이 버티는 삼성-현대의 양강 체제였다. 하지만 1988-89시즌부터 기아산업이 새로운 강자로 올라섰다. 기아는 김유택-한기범 쌍돛대가 골밑을 장악한 데다 허재까지 가세하면서 5년 연속 정상에 오르며 '기아 시대'를 열었다.

허 감독은 "1986년 창단한 기아산업이 먼저 (김)유택이 형과 (한)기범이 형을 영입했고, 1988년에 내가 합류했다. 1990년에 (강)동희가 가세하면서 '허-동-택 트리오'가 완성됐다"면서 "1988년 서울올림픽에 막내로 참가해 개최국 대한민국 선수단 대표로 선서를 했다. 세계의 벽은 높았지만, 이충희·김현준(별세) 형과 힘을 합쳐 9위(2승5패)를 했다. 드라마 장면을 보며 옛 생각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KCC를 10년간 이끌면서 두 차례 우승컵을 들었던 허재 감독은 지난해 물러난 뒤 아들 허웅(22·동부)의 활약을 지켜보고 있다.

송지훈·김효경·박린 기자 mil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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