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 벗어난 예린이의 첫 마디 "피자가 먹고 싶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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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점 CCTV에 찍힌 예린(11ㆍ가명)이의 모습. [사진 연수경찰서]

 
“피자가 먹고 싶어요.”

지난 22일 오후 인천시 동춘동의 A병원. 예린(11ㆍ가명)이가 아동심리 전문가와 상담을 시작하고 나서 조심스레 내뱉은 첫 마디였다.

“왜 피자를 먹고 싶어?”

“1년 전에 피자를 한번 먹어봤어요. 아빠, 엄마가 시켜먹었는데 저는 다 먹고 난 뒤에 찌꺼기만 줬어요. 더 먹고 싶다고 했는데 (아빠가) ‘안 된다’면서 무섭게 혼을 냈어요.”

예린이는 인천 연수구의 한 빌라에서 친부 A(32)씨와 동거녀로부터 감금·상습 폭행 등 수년간 학대를 받았다. 손과 발이 노끈에 묶인 채 세탁실에 갇혀 있다가 지난 12일 가스 배관을 타고 탈출해 구조됐다.

열한 살 예린이의 눈빛은 맑았지만 누군가를 똑바로 쳐다보질 못했다. 목소리는 높낮이가 없었다. 조용하고 일정한 톤의 말투엔 위축된 심리 상태가 그대로 반영돼 있었다. 영양 상태가 부실한 탓에 손톱 주변은 눈에 띄게 부르터 있었다. 최근 수액치료와 함께 정상적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하면서 몸에 급격한 변화가 찾아오자 손과 발이 일시적으로 부어 오른 상태였다.

예린이는 불안했다. 한 곳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고 계속해서 병실 주위를 돌아다녔다. 전문가는 "지속된 감금과 폭력으로 인해 생긴 답답한 마음과 불안한 심리 때문에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예린이는 대화를 하면 할수록 또박또박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단답형의 짧은 대답 대신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하고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뭐야?”

“그동안 산타할아버지한테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이번 크리스마스에 처음으로 산타할아버지에게 인형을 선물 받고 싶어요.”

“또 하고 싶은 일이 있을까?”

“너무 답답해요. 빨리 밖으로 나가 공원에 가서 마음껏 걷고 싶어요. 따뜻하고 넓은 공원이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예린이는 자신의 감정 상태를 있는 그대로 얘기하지는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걱정도, 슬픔도 없다고 했다.

“여기 혼자 있으면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을까?”

“저는 (언제나) 혼자 있었어요. 혼자서 밥도 먹고 혼자서 생각도 하고요. (뭐든지) 혼자 다할 수 있어요.”

“걱정되는 일은 있니?”

“없어요.”

“슬픈 일은 있을까”

“슬픈지 잘 모르겠어요.”

이에 대해 정신과 전문의들은 “(걱정이 없고 슬프지 않다는 대답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자신을 가장 보호해야할 친부의 상습적인 학대에 익숙해진 상황에서 ‘걱정된다. 슬프다. 외롭다’와 같은 감정 표출이 습관적으로 제한됐을 뿐”이라며 “예린이의 마음 속엔 불안함이나 깊은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전문가를 통해 지속적으로 마음을 치유하고 꾸준하게 심리상태를 관리해야한다”고 말했다.

예린이는 장래에 하고 싶은 일로 요리사와 과학자를 꼽았다. “요리사가 돼서 제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들을 아주 많이 만들고 싶어요. 요리사를 하면서 공부도 열심히 해서 훌륭한 과학자도 될 거에요.”

예린이는 초등학교를 다닐 때 과학이나 실험과 관련된 공부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자신을 학대한 비정한 아버지에 대해선 처벌하고 싶다는 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했다. '아버지가 처벌받기를 원하느냐'고 묻자 예린이는 또렷한 목소리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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