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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정해 놓은 당신의 마지막날 통보 받는다면 …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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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호 30면

당신이 상상했던 신은 잊어라. 온화한 미소로 세계 평화를 위해 굽어 살피리라 믿었다면 오산이다. 여기 벨기에 브뤼셀에 살고 있는 신(브누와 포엘부르드)은 괴팍하기 짝이 없으며, 고집불통에,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네 이웃을 사랑하기는커녕 아내인 여신(욜랜드 모로)은 입도 뻥긋 못하게 하고 딸 에아(필로 그로인)는 말을 듣지 않는다며 허리띠로 채찍질까지 가한다. 그것도 모자라 사는 게 지루하다는 이유로 대홍수를 만들고 전쟁을 일삼으니, 이 어찌 신이라 할 수 있겠는가. 딸의 입에서 아빠를 향해 ‘개망나니’ 소리가 나오는 것도 과언이 아니다.


에아는 날로 심해지는 아빠의 만행을 보다 못해 탈출을 결심한다. 입구도, 출구도 없는 집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오빠 JC(다비드 무르기아)의 도움이 절실하다. 앞서 인간세계로 나가 12사도를 모았던 JC는 “엄마가 좋아하는 야구팀 숫자가 좋겠다”며 6명을 더 모아 18사도를 채울 것을 권한다. 신도 세상을 구원하려면 인간의 도움이 필요하단 얘기다.


에아는 내친 김에 하나의 복수를 더 감행한다. 신의 컴퓨터를 해킹해 모든 사람에게 남은 수명을 전송한 것. 25년 3개월 8일, 54일 같은 날짜를 받아든 사람들은 대혼란에 빠진다. 내가 죽을 날을 미리 알게 된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의외의 답안지를 받아든 사람들의 행동은 저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자신의 남은 수명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어떤 이는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수명이 남은 배우자나 자녀를 시샘해 그들을 해칠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변화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진다는 것. 사랑받지 못했던 이는 제대로 된 사랑을 꿈꾸고 남자의 옷이 맞지 않았던 이는 여자의 옷으로 갈아입는 등 삶의 진짜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죽는 날을 알면 누가 고생하겠어.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살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나를 두려워하는 것”이란 신의 우려는 그렇게 현실이 된다.

죽음에 대한 고찰이 영화의 한 축이라면 사도를 찾는 재미가 이야기의 다른 한 축을 완성한다. 신에 대한 환상이 깨어진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에아가 찾는 6사도 역시 고귀하고 비범한 사람들은 아니다. 되려 평범하고 어딘가 하나 모자라거나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았던 사람들이 더 많다. 밀실에 갇혀 컴퓨터로 뚝딱이며 천지창조를 하던 아버지와 달리 낮은 세상으로 몸소 임한 모습이랄까. 아직 어린 에아 대신 새 신약성서를 기록하는 사람 역시 까막눈의 노숙자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무리 없이 에아와 함께 출(出)아파트기를 비롯 성도착자복음ㆍ살인자복음 등을 써내려간다.


외팔 미녀ㆍ워커홀릭ㆍ성도착자ㆍ습관성 킬러ㆍ유한마담ㆍ병약한 소년 등 인간 유형은 다양하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외로움을 품고 있다. 에아는 아빠나 오빠처럼 바다를 가르고 인간을 창조하진 못하지만 마음 속 음악을 듣는 재주가 있다. 어릴 적 사고로 팔을 잃은 미녀 오렐리에게서 헨델의 ‘울게 하소서’를 듣고 그 음악에 걸맞는 꿈을 선사하는 식이다. 그러니 어찌 이들이 에아를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고 그 상처를 어루만지니 말이다. 내 안엔 어떤 음악이 울려퍼지고 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여신이 그간 숨기고 있던 능력 역시 기대해도 좋다. 설령 신은 그리 아니하실지 몰라도 세상은 공평하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니.


영화를 신에 대한 풍자로 읽든 기독교나 가톨릭에 대한 비판으로 읽든 그것은 관객의 자유다. 허나 어느 쪽도 불편하게 하지 않는 게 이 영화의 미덕이다. 실은 그 속에 가부장제나 외모지상주의,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 등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날선 비판의식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팬이라면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이 될 듯하다. 유럽의 거장으로 칭송받는 그이지만 다작을 하지 않아 ‘토토의 천국’(1991) ‘제 8요일’(1996) ‘미스터 노바디’(2009)에 이은 네 번째 작품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24일 개봉. ●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사진 앳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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