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에 박수 친 이유? 패배의 아픔 처절히 느끼기 위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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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를 마친 뒤 그라운드에 남아 두산의 우승을 축하하는 삼성 선수단. [사진 삼성 라이온즈]

프로야구 류중일(52) 삼성 감독은 오는 18일부터 닷새간 태국 여행을 떠난다. 그는 “1년 중 연말 며칠이 유일하게 가정에 봉사하는 시간이다. 태국으로 가는 건 올해로 3년째”라며 껄껄 웃었다. 여느 겨울과 같은 일정을 보내고 있지만 기분은 좀 다르다. 감독 부임 첫 해인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4년 연속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KS) 우승을 이끌었던 그는 올해 한국시리즈에서 두산에 1승4패로 져 우승 트로피를 내줬다. 2인자에게는 한겨울 추위 같은 쓸쓸함과 허망함이 밀려든다. 지도자로서 탄탄대로만 걸었던 류 감독은 처음으로 그걸 느끼고 있었다.

류중일 감독, 한국시리즈 그 후

새 챔피언에 대한 예우였지만
우승 못하면 축하하는 신세 된다
선수들 자만심 버리라는 의도도

FA 영입 더는 큰 돈 쓰기 어려워
박석민 빈자리 유망주로 메울 것

 - 어떻게 지내시나요.

 “지난주 골든글러브 시상식(8일)을 끝내고 대구로 와서 쉬고 있어요. 17일에 둘째 아들(승훈)이 제대해서 마중 나갈 예정이고요. 그 다음날 아내(배태연씨)와 둘이 태국으로 가요. 똑같은데 우승을 못한 것만 다르네. 허허.”

 - 5년 전 삼성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생각이 날 것 같은데요.

 “2010년 우리가 KS에서 (SK에 4패를 당해) 준우승을 했죠. 그해 12월 감독이 됐는데 참 막막했어요. (준우승보다)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컸습니다. 그런데 2011년부터 계속 우승을 했단 말이죠. 그래도 올해 또 한번 우승을 하고 싶었어요. 사람 욕심이란 게 끝이 없더라고.”

 4년 연속 통합우승(정규시즌과 KS를 모두 제패)은 이미 프로야구 최고 기록이다. 해태가 4년 연속(1986~89년) KS 우승을 하는 동안 정규시즌 우승은 한 차례(88년)밖에 없었다. 류 감독은 5년 연속 KS 챔피언에 올라 해태의 기록을 깨고 싶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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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KS에서 졌습니다.

 “아쉬워요. 많이 아쉬워요. 끝난 지 한 달이 지났는데 KS 경기가 계속 떠올라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 꽤 오랫동안 그럴 것 같네.”

 2002년 이후 정규시즌 우승팀이 13년 연속 KS 챔피언에 올랐다. 삼성은 올해도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했지만 KS 직전 주축투수 3명(임창용·윤성환·안지만)의 불법도박 스캔들이 불거지면서 크게 흔들렸다. 사회적 파장이 커지자 삼성 구단은 이들 3명을 제외한 채 KS를 치렀고 결국 1승4패로 무릎을 꿇었다.

 - 3명의 공백이 얼마나 컸나요.

 “솔직히 3명을 빼고도 할만 하다고 봤어요. 두산은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치르느라 지쳤으니까. 1차전에서 9-8로 역전승을 하고 나서 ‘또 우승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결국 지더라고. 야구가 참 마음대로 안 돼요. 야구가 참 어렵다는 걸 새삼 느꼈어요.”

 - 힘이 모자라서 진 건가요.

 “그보다는 분위기 싸움에서 졌지. 갑자기 투수 3명이 빠지니까 팀이 어수선한 거야. 한 번 밀리기 시작하니까 더 걷잡을 수 없더라고요. 돌이켜 보면 내가 인터뷰를 할 때 ‘우리 투수력이 약화됐으니 몽둥이(타선)가 잘해줘야 한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그 말을 전해 듣고 타자들이 부담을 느꼈나 봐요. 최형우·박석민·나바로가 다 못 쳤잖아. (다시 그 당시로 돌아가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똑같이 말하겠죠. 타격이 안 돼서 진 게 사실이니까.”

 - KS 패배 후 더그아웃 앞에 도열해 박수를 쳐준 장면이 화제가 됐습니다.

 “두 가지 의도로 그렇게 했어요. 먼저 우리가 4년 연속 KS에서 우승했으니까 우리 다음에 챔피언에 오른 두산을 축하해주고, 예우하자는 뜻이었죠. 더 중요한 이유는 나와 선수들의 각성을 위해서였죠. 우승 세리머니를 하는 선수들에게 박수를 치면서 ‘우승 못하면 축하해 주는 신세가 된다. 1등과 2등의 차이는 이렇게 크다. 자만을 버리고 다시 우승에 도전하자’고 스스로 다짐했죠. 선수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기를 바랍니다.”

 - 3루수 박석민이 NC로 떠났는데요.

 “박석민의 공백이 클 겁니다. 그렇지만 구단의 결정이니 따라야죠. 앞으로 삼성은 외부에서 자유계약선수(FA)를 영입하기보다는 내부에서 유망주를 키우는 방향으로 운영할 겁니다. 선수를 키우는 게 말처럼 쉽지 않지만 분위기를 다잡아서 그렇게 해야죠.”

 삼성 야구단은 내년 1월 1일자로 삼성그룹 계열사인 제일기획으로 이관된다. 그동안 독립법인 형태로 삼성 계열사의 지원금을 받아 운영됐던 야구단은 연 400억~500억원의 예산을 썼다. 그러나 삼성 야구단도 축구·배구·농구단처럼 제일기획에 편입되면서 과거처럼 돈을 쓰기 어려울 전망이다. 삼성이 전성기의 FA 선수를 다른 팀에 내준 건 박석민이 처음이다.

 - 임창용은 방출됐고, 나머지 2명의 거취도 불분명한데요.

 “KS 엔트리에서 세 선수를 제외하면서 면담을 했어요. 수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각자 운동은 잘하고 있으라고요. 임창용은 검찰조사에서 혐의를 일부 시인했으니 40인 명단에서 제외했죠. 윤성환·안지만에 대해서 정해진 건 아직 없어요. 경찰 수사가 끝나기를 기다려야죠.”

 - 내년 시즌 준비하기 쉽지 않겠어요.

 “많은 전문가들이 삼성은 더 이상 우승 후보가 아니라고 하대요. 그래도 내 목표는 우승입니다. 지금까지 챔피언이었다면 이제부턴 도전자죠. 3루수 박석민의 공백을 젊은 선수가 메워야 합니다. 2루수 나바로의 계약도 아직 안 됐어요. 내년 시즌에는 외야수 최형우와 왼손 투수 차우찬이 FA가 됩니다. 베테랑이 빠져나가면 유망주들에겐 좋은 기회가 생기는 거죠.”

 - 내년 훈련량이 많이 늘겠네요.

 “우리 훈련량이 원래 많은 편이에요. 매번 우승을 했으니까 열심히 한 과정을 몰라줘서 그렇지. 허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해야죠. 선수들 몇 명 빠져나갔다고 우승을 못한다는 건 감독이 할 말은 아니죠. 그건 핑계잖아요.”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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