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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美 본질만 쏙 뽑아 차린 ‘코스 정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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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호 30면

막이 열리면 온통 흰 세상이다. 갓 싹을 틔운 목련꽃 가지 같은 적(翟)을 든 백의(白衣)의 무용수들이 낭랑한 소리에 맞춰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세종조 창안된 궁중무용 ‘전폐희문’을 세종 때부터 직접 제작해 온 악기 경(磬)에만 의존해 추는 경건한 춤이다. 국립무용단의 신작 ‘향연’의 서막이다.


다양한 전통무용을 묶어 갈라 형식으로 선보여온 오랜 레퍼토리 ‘코리아 환타지’를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한 ‘향연’은 그간 장기 프로젝트로 계획해오다 문화융성 2기에 즈음한 정부의 전통재창조 사업에 탄력 받아 적극 추진된 야심작이다. 민속 무용 위주였던 전작에 비해 궁중무용과 종교무용을 더해 전통 춤을 총망라한 무대로 완성됐다.


조흥동·김영숙·양성옥 등 전통 춤의 대가들이 안무를 맡고, ‘단’ ‘묵향’ 등으로 국립무용단과 인연을 맺어온 패션디자이너 정구호가 연출했다. 춤 자체보다 연출이 부각되는 최근 무용계 흐름에 비판의 소리도 있지만, ‘향연’은 무용 공연에서 연출의 위력을 과시하는 전범이 됐다. 안무까지 현대성을 가미한 소위 ‘국적불명의 춤’이 아니라 가장 전통적인 원형을 추구하는 안무가들이 굳건히 우리 춤선을 지킨 상태에서 오로지 연출만으로 변화를 일궈냈기 때문이다.


구성은 전통을 지키면서도 스타일리시한 무대로 크게 호응받았던 ‘묵향’(2013)을 확장한 형태다. 12가지 다른 춤을 봄·여름·가을·겨울 총 4막에 배치했다. 단순 비트에서 다채로운 가락에 이르기까지 점점 상승해가는 음악과 함께 의상과 무대도 무채색에서 오방색으로 나아가며 버라이어티한 한바탕 향연을 완성해가는 구조다.


정구호는 포장과 배치의 진정한 능력자다. 무늬만 현대적으로 꾸민 것이 아니라 각 춤의 철학과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 극대화시켜 보여준다. 궁중무로 예를 갖추며 시작해 종교적 의식을 거쳐 민속무로 축제분위기를 띄우고, 대화합을 기원하는 태평무로 마무리하는 나름의 스토리까지 갖췄다. 음악도 번잡하게 들리는 선율을 제거하고 뼈대인 타악 리듬에서 시작해 조금씩 살을 붙여가며 국악의 매력을 구조적으로 느끼게 구성했다.


1막 ‘봄’은 격조 있는 궁중무용으로 우리 예술의 위엄을 잡고 보는 장이다. 종묘제례악의 ‘전폐희문’에서 여성들이 모란을 꺾으며 추는 ‘가인전목단’, 군왕의 무공을 찬양하는 ‘정대업지무’로 이어지는데, 화려한 색상을 걷어내고 무채색만 남긴 정구호 미니멀리즘의 극치다. 모란 꽃병 대신 민화 모란도를 추상화시킨 듯한 거대한 붉은 매듭의 모던함이라니.


2막 ‘여름’에는 전형적인 굿거리장단과 함께 춤도 역동적으로 변해간다. 반짝이는 은색 바라를 든 바라춤, 붉은 조명 속의 승무를 거쳐 사정없이 꽹과리를 두드리는 진쇠춤으로 고조되어 가는 무대에 관객의 신명도 더해 간다.


3막 ‘가을’의 축제에 이르면 이제껏 예고편이었음을 깨닫는다. 무대 3면의 사각 스크린은 청명한 가을 하늘이 되어 두둥실 구름을 띄우고, 청색 두루마기의 한량무와 백색 두루마기의 학춤이 섞였다 흩어졌다 선비춤으로 어우러진다. 그 뒤로 몰아치는 장구춤과 소고춤, 오고무 퍼레이드는 그야말로 스펙터클의 ‘향연’이다. 장구를 머리 위에 얹고 놀라운 속도로 수십 바퀴를 도는 김미애의 솔로는 고전발레의 그랑 푸에테 못잖고, 소고춤의 남성무용수들은 그랑 쥬떼를 돌 듯 박력 있게 등장해 각자 다른 솔로로 기교를 뽐낸다.


압권은 회전무대가 도는 ‘오고무’다. 어둠 속 피트에서 솟아 오른 솔로 북 주자가 난타치듯 맹렬한 두드림으로 장을 열면, 가로로 길게 선을 그리던 북들이 90도 회전하며 하나의 점이 된다. 노란 치마를 두른 24명 여성무용수들이 마주보고 현란한 북춤을 출 때 빙글빙글 돌아가는 무대는 이들의 군무를 입체적으로 속속들이 조망하게 한다.


4막 ‘겨울’의 ‘신태평무’에 이르러 전통의 오방색이 비로소 갖춰진다. 검정 배경 막과 흰 바닥을 배경으로 노란 매듭 7개가 드리운 사이사이 청·홍 의상의 남녀 무용수가 교차하며 우리 민족의 화려한 색감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다.


이전의 한국무용 갈라가 거하게 차린 한상차림이었다면, ‘향연’은 그저 음식이었던 각 디시의 개성을 일일이 요리로 승격시킨 코스 정찬이 되었달까. 맛과 정성은 그대로지만 디스플레이의 변신만으로 격을 바꾼 셈이다. 한국적 아름다움의 본질만 쏙쏙 뽑아낸 덕에 한국 춤이 이토록 기교 넘치며 절도 있고 정제된 춤이었는지도 새삼 발견했다. 안무 조흥동 선생은 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서 “항간에 내가 끌려다닌다는 말도 있던데 끌려다니는지 끌고가는지는 무대에서 보자”고 했다. 이제 보니 완벽한 합을 이뤄 함께 끌고가는 무대였다. 예술은 늘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때 전진하는 법이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사진 국립무용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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