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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 증인 말씀이죠? 변호사님 ‘말하기 열공’ 하시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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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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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언행 컨설팅을 맡은 엘 컴퍼니 조 에스더 대표가 지난 10일 서울중앙지법의 한 법정에서 이현복 판사에게 법정 제스처와 화법을 지도해 주고 있다. 조 대표는 “판사가 앉는 위치와 자세, 의자의 정돈상태, 손짓과 시선도 재판 당사자의 신뢰감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김경빈 기자]

대형 법무법인 소속 A 변호사(41·연수원 35기)는 2012년 소송가액이 800억원이 넘는 사건을 변론하는 과정에서 곤란을 겪었다. 복잡한 사건의 배경을 재판부에 설명하기 위해 프레젠테이션을 자원했던 게 화근이 됐다. A 변호사는 “10분 넘게 말을 해야 하는데 숨이 자주 차올라 힘들었다”고 기억했다.

[현장 속으로] 스피치학원 찾는 법조인들

구술변론·국민참여재판 ‘말’ 중요
인터넷·케이블 통해 재판 생중계
TV 프로 출연해 인지도 높이기도

 몇 달 후 A 변호사는 용기를 내 아나운서를 양성하는 스피치학원을 찾았다. 주 1회 4시간씩 8주에 걸친 하드 트레이닝이었다. 핵심은 복식호흡. A 변호사는 “학원에서 배운 복식호흡을 틈틈이 연습하다 보니 호흡뿐만 아니라 목소리 톤도 신뢰감 가는 중저음으로 바뀐 것 같아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변호사 20년 차인 B 변호사가 지난해 W스피치학원을 찾은 건 ‘증인’을 ‘증인’이라고 부르고 싶어서였다. 교육을 맡았던 정은아 강사는 “B 변호사는 자꾸 ‘증인’을 ‘정인’이라고 발음해 변론할 때마다 판사들이 되묻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며 “표준어 집중반에서 8주간 수업을 받고는 발음이 완전히 교정됐다”고 말했다. B 변호사는 강의 외에도 원고와 방송 음성 파일을 휴대전화에 받아 수시로 들으며 반복훈련을 했다고 한다.

 스피치 학원이나 이미지 컨설턴트, 프레젠테이션 강사 등 ‘말하기’ 전문가를 찾는 법조인들의 발길이 부쩍 늘고 있다.

 재판 양상이 ‘말’ 중심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론(辯論)’이라는 단어 자체에 ‘말로 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지만 불과 10년 전까지도 재판에서 말 소리를 듣기란 쉽지 않았다. 판사와 변호사·검사가 차례로 준비한 서면을 제출하는 게 재판 진행의 뼈대였다.

 서면에서 말로의 급격한 변화는 2005년 취임한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이듬해 “검사가 작성한 수사기록을 던져 버리라”고 설파하며 공판중심주의와 구술변론주의의 정착에 드라이브를 걸면서 찾아왔다. 2008년엔 구술변론이 극대화된 재판 형식인 국민참여재판이 도입됐다. 대법원은 급기야 2013년부터 공개변론을 인터넷과 케이블을 통해 생중계하기 시작했다.

 지난 6월 이혼소송 유책주의와 파탄주의의 원칙이 맞부딪친 대법원 공개변론 땐 방송출연으로 말 솜씨가 입증된 양소영(44·연수원 30기), 김수진(48·여·연수원 24기) 변호사가 양측의 국선변호인으로 선임돼 치열한 프레젠테이션 경쟁을 펼치는 모습이 생중계됐다.

대기업 자문이나 송무의 수임절차가 프레젠테이션을 전제로 한 경쟁입찰로 변화하고, 2011년 개국한 다수의 종합편성채널의 각종 시사·예능 프로그램이 변호사들에게 인지도를 높일 기회를 주고 있는 것도 변호사들의 ‘말 욕심’을 자극하는 요인이다.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분명한 발음이 인상적인 법무법인 세종의 백대용 변호사는 이런 변화에 미리 대비해 빛을 본 사례다. 서면재판 위주이던 2006년 백 변호사는 유명 아나운서가 운영하는 학원에서 10회 트레이닝을 받았다. 그즈음 방청했던 재판에서 재판장이 “서면 내용을 요약해 말해 보라”고 주문하자 담당 변호사가 당황해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본 게 계기였다고 한다. 당시 재판장이 “의사표현도 제대로 못하면서 의뢰인의 권리를 어떻게 대변하겠느냐”며 역정을 내는 모습을 보고 구술변론에 대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 법조인 양성과정에 ‘커뮤니케이션’ 없어=구술변론은 재판진행의 핵심이 됐지만 말을 ‘제대로’ 하는 변호사를 찾기란 쉽지 않다. 백 변호사는 “주로 도서관이나 고시원에서 혼자 공부하다 변호사가 된 경우가 많아 머릿속 논리를 말로 표현하는 데 서투른 경우가 많다”며 “프레젠테이션이나 구술 변론에 부담을 느끼는 동료가 적잖다”고 귀띔했다.

 A 변호사 역시 “일반인이 보기에도 심각한 수준인 변호사도 많다”며 “횡설수설하거나 벌벌 떨다가 재판을 끝내는 변호사가 수두룩하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변호사 양성체계에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가르치는 교육과정은 없다.

 서울 소재 로스쿨 출신 서모(변시 4회) 변호사는 “모의재판이나 리걸 클리닉 과목처럼 구술변론을 해 볼 기회는 있지만 재판진행의 절차를 가르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지 효과적인 의사표현을 가르치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사법연수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실무교육을 한다지만 커리큘럼은 모두 각종 서면 작성기술 습득에 치중돼 있다. 사시 출신인 김모 변호사(연수원 43기)는 “법정 언행을 훈련하는 정규 교육을 받아 본 기억은 없다”며 “대부분 강독식 수업이다 보니 말하는 훈련을 할 기회도 별로 없다”고 말했다.

 미국은 정반대다. 최근 미국 조지타운대 로스쿨에서 법학전문석사(LL.M) 과정을 마친 김모(35·연수원 37기) 변호사는 “미국 로스쿨에는 커뮤니케이션 관련 수업들이 개설돼 있지만 학생들이 워낙 어려서부터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데 익숙해 인기가 높진 않다”며 “표현의 자유의 힘인 것 같다”고 말했다.

법정 언행 컨설팅, 검사까지 확대=할 말이 늘어난 건 변호사만이 아니다. 구술변론주의의 정착으로 판사나 검사의 말도 재판의 당사자나 방청객, 언론의 감시대상이 되면서 말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는 판검사들도 적지 않다.

지난 수년간 막말 판사 논란으로 홍역을 치른 법원은 2013년부터 전문 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를 초빙해 법정 언행 컨설팅을 진행하고 있다. 일부 재판장을 대상으로 하던 교육이 올해부터는 부장판사 승진을 앞둔 모든 판사로 확대됐다. 검찰도 올해 초부터 송무를 담당하는 검사들에게 같은 교육을 받게 하고 있다. 올해만 80여 명의 판사와 40여 명의 검사가 교육을 받았다.

재판진행 과정을 녹화한 영상을 보며 1차 컨설팅을 진행한 뒤 2~3개월 내에 두 차례 암행어사식 모니터링을 실시한다. 이어 다시 한 번 교정 여부를 확인하고 평가하는 과정이다. 옷매무새, 앉는 자세, 시선과 손짓 등의 동작도 교정 대상이지만 주된 것은 언어습관과 목소리 톤, 호흡 등을 바로잡는 일이다.

 변호사들을 상대로 한 스피치 교육이 의사표현에 집중돼 있다면, 판검사들이 받는 교육은 상대방이 잘 말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법이 중심이다.

 이 교육을 맡고 있는 조에스더(41) 엘 컴퍼니 대표는 “판사는 늘 하던 대로 ‘증인석으로 나오세요’ ‘선서하세요’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계속되는 명령형 문장에 당사자들은 심한 압박감을 느낀다”며 “‘선서하시죠’와 같이 청유형으로 절차를 안내하길 권한다”고 말했다. 정윤재 컨설턴트는 “민사사건 조정이 끝난 뒤 ‘소 취하하시겠어요’라는 말을 못 알아듣는 70대 할머니를 향해 재차 소리높여 ‘소 취하하시겠냐고요’라며 묻는 재판장을 봤다”며 “판사 입장에선 일상적인 용어도 일반인에겐 어려운 법률용어인 경우가 많아 쉬운 말로 재판을 진행하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마지막 컨설팅을 받은 서울중앙지법 이현복 판사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세상에서 가장 따듯하고 인간적이었던 재판 진행이 당사자들에겐 평생 가장 엄혹하고 억압적인 재판일 수도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조 대표는 “사실 재판 경력 15년 안팎 판사들의 습관을 교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며 “사법연수원이나 로스쿨 등 법조인 양성 단계부터 적절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계발하는 프로그램이 정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글=임장혁 기자, 김미진 인턴기자(서강대 언론정보학 4)im.janghyuk@joongang.co.kr
사진=김경빈 기자

[S BOX]법조인들 이것부터 고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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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넥스트 컨설턴트 정윤재(47·사진)씨는 10일 ‘좋은 재판’을 위한 5가지 팁을 제시했다. 정씨는 3년째 서울과 수도권 판사를 대상으로 ‘언행’ 컨설팅을 하고 있다.

 1. 눈높이부터 낮춰라. 판사·검사·변호사 등 법조인에겐 익숙한 용어라도 일반인은 알아듣기 힘든 게 많다. ‘소 취하하시겠어요’ 같은 말도 ‘소송 그만두시겠어요’로 쉽게 말해주면 친절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비유적 표현도 도움이 된다. 원고와 피고가 서로 끼어들며 격렬하게 언쟁할 때 재판장이 “야구처럼 공격과 수비 차례를 지키는 게 룰”이라고 일침을 가해 법정 분위기가 바뀐 사례도 있다.

 2. 주변 사람에게 피드백을 받자. 재판 진행에 대해 일반인의 느낌은 다를 수 있다. 자신도 모르게 화를 내거나 언성이 높아질 경우 배석 판사나 법정 사무관들에게 포스트잇 메모를 전달해달라고 부탁해놓자. 일부 판사는 배우자를 법정에 불러 모니터링을 받기도 한다.

 3. 경청하는 제스처를 보여라. 심문 도중 조서나 모니터를 보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당사자는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오해할 수 있다. 모니터로 얼굴을 가리지 말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경청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4. 위로의 한마디가 중요하다. 피고인이 답답한 마음에 중언부언 하소연을 늘어놓더라도 중간에 자르면 서운해진다. “힘드셨겠다”는 위로의 말 한마디와 “5분 드리겠다”며 말할 시간을 주는 것도 좋다.

 5. 공식적인 어미를 사용하라. ‘~요’ ‘~죠’보다는 ‘~다’ ‘~까’와 같은 공식적 어투를 쓰는 게 좋다. 비공식적 어미를 쓰면 자칫 재판을 가볍게 진행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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