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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대란과 창조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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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경희 기자 중앙일보 P디렉터
김회룡
김회룡 기자 중앙일보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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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키즈팀장

지난 1일 ‘유치원 원서를 넣으며’라는 글을 온라인 중앙일보 Jplus에 올렸다. 화제의 칼럼 ‘간장 두 종지’ 형식을 빌려 평일에 열리는 유치원 설명회와 원서 접수 등에 대해 하소연한 글이었다. 하지만 추첨이 끝나고 보니 추첨 전의 대란은 대란도 아니었다.

 7일 오후 5시 A유치원 인근 대강당에 500여 명이 모였다. 만 3세 신입 원아 19명(남아 9명, 여아 10명)을 추첨하는 자리였다. 휴가를 내고 달려가 한 시간 넘게 기다려 뽑은 결과는 여아 대기 150번대. 그나마 같은 시각 친정엄마가 B유치원에서 대기 11번을 건졌지만, 대기란 불확실성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지난해 서울시교육청은 한 아이당 3곳까지만 지원하게 했다가 중복 지원을 막을 방법도 능력도 없다는 게 드러나 망신을 당했다. 올해는 제한이 없었기에 부모들은 어디든 한 곳이라도 걸리라는 심정으로 묻지마 지원을 했을 것이다. 경쟁률이 수십 대 1이어도 중복 당첨되는 ‘축복받은’ 아이들은 꼭 있다. 또 진짜 그 유치원이 좋아서가 아니라, 일단 등록을 해둔 부모들이 막판에 어떻게 움직일지 모른다. 생각보다 원비가 비싸서, 철학이 안 맞아서, 셔틀을 오래 타서 등 포기할 이유는 많다. 나 역시 인근의 영어유치원에 등록을 해뒀지만 혹시나 대기 중인 유치원에서 연락이 오면 환불받을 가능성이 크다. 엄청난 사회적 낭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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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보건복지부가 관할하는 어린이집은 부족하나마 온라인 대기 시스템을 활용하는데, 교육부 관할 유치원은 왜 이리 ‘전통적’일까. 의아해하던 차에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이광근 교수가 ‘유치원 원서를 넣으며’를 읽었다며 제보 메일을 보내왔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려다 원시적인 추첨 방법에 충격을 받았다는 같은 과 허충길 교수와 함께 오픈소스를 활용해 베리드로(veridraw.snu.ac.kr)라는 컴퓨터 추첨 방법을 개발했단다. 그걸 이번에 서울대 인근 나랑유치원에 적용했다. 나랑유치원 박수진 원장은 “공정하면서도 매우 합리적이다. 추첨을 간소화한 덕분에 설명회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내년에는 가능하다면 접수도 온라인으로 받고 싶다”고 말했다.

 나아가 권역별 지원과 배정, 추첨을 해결할 수 있다면 ‘헬조선’의 부모에겐 노벨상·필즈상에 맞먹을 업적이다. 교육지원청은 공간을 마련해 권역별 유치원 ‘주말’ 합동 설명회를 열어 부모들이 한자리에서 골라 들을 수 있게 해주고, 접수와 추첨은 컴퓨터로 하는 건 불가능한 꿈일까. 그야말로 IT 강국의 위상에 걸맞은 창조경제일 텐데.

글=이경희 키즈팀장
일러스트=김회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