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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이 되어 모였네, 김환기의 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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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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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국미술계 최대 파란은 단색화(單色畵)의 부활이다. 1970년대 미술의 뒤안길에서 침잠해있던 단색화는 순식간에 튀어 올라 세계 미술사에 도전하는 영광의 길을 걸었다. 국내외 미술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킨 단색화 기세의 정점은 수화(樹話) 김환기(1913~74·사진)의 ‘19-VII-71 209’가 지난 10월 5일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한국 미술품 최고가를 기록한 순간이었다. 제목 그대로 수화가 71년 7월 19일 미국 뉴욕에서 그린 209번째 점화(點畵)는 47억2100만원에 낙찰돼 2007년 박수근의 ‘빨래터’가 세웠던 45억2000만원을 8년 만에 제쳤다. 미술계는 가격보다 작가와 작품에 더 의미를 뒀다. 한국적 소재와 미감으로 수년 간 경매장을 선도하던 박수근을 밀어내고 서구 추상화의 흐름에 가까운 단색화가 깃발을 꽂았기 때문이다.

현대화랑서 ‘선·면·점’전
70년대 단색화 부활 재조명

 수화 김환기는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문재(文才)가 출중했던 화가 중 한 명이다. 70년에 그린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비롯해 문학성 도드라진 작품들로 한국적 서정주의를 꽃피운 작가로 손꼽힌다. 지난 4일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막을 올린 ‘김환기의 선線·면面·점點’전은 수화의 점화가 만개한 만년 작 22점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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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고요’, 코튼에 유화, 1973. [사진 현대화랑]

 서울에서 우정을 나눴던 시인 김광섭의 시 ‘저녁에’에서 영감을 받은 그는 그리운 고향 친구들을 생각하며 점을 찍고 또 찍었다고 한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예술적 동지였던 부인 김향안(1916~2004) 여사는 남편의 점화 작업 과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큰점, 작은점, 굵은점, 가는 점, 작가의 무드에 따라 마음의 점을 죽 찍는다. 붓에 담긴 물감이 다 해질 때까지 주욱 찍는다. 그렇게 주욱 찍은 작업으로 화폭을 메운다. 그 다음 점과 다른 빛깔로 점들을 둘러싼다.”

 ‘아침의 메아리’ ‘밤의 소야곡’ ‘10만 개의 점’ ‘고요’ 같은 작품 제목을 따라가노라면 절대 고독 속에서 한없이 점을 찍고 있는 화가의 모습이 떠오른다. ‘미술은 하나의 질서다’라 했던 수화는 수십만 개 점을 찍으며 그 우주적 질서를 찾아가는 긴 여행을 했는지도 모른다.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는 수화의 그림에서 종교적 체험을 할 수 있다며 “김환기의 선, 면, 점은 화면 속에서 춤추는 조형의 유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그가 그려 왔던 온갖 형상들, 이를테면 산·강·달·마을·매화·학·백자·달항아리 등의 조형적 압축이었다”고 설명했다. 유 교수는 “수화의 그림 형식만 놓고 본다면 무수한 점으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은 분청사기 인화문을 연상케 하지만 김환기의 낱낱 점에는 압축 형상의 혼이 들어 있다”고 강조했다.

 전시는 내년 1월 10일까지. 02-2287-3591.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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